[방언 시리즈 1] 방언의 숨겨진 비밀 "랄랄라 방언과 따다다 방언의 차이" / 인바이블 말씀사역 // 크리스천 신앙 성장을 위한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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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네일 표지
출처 : 대영교회 컬럼
제목 : “기도하는 손”
링크 : http://www.daeyoung.org/board/bbs/boa...

배경 음악
출처 : Music Copyright ⓒ Christian BGM All Rights Reserved.
제목 : “내 주의 은혜 강가로”
링크 :    • [Vol.17] 잔잔한 은혜가 머무는 CC...  

얼마 전 충주에 사는 한 자매님이 방언과 관련된 메일을 주셨습니다.
유튜브를 보니, “랄랄라 따다다하는 방언”은 방언이 아니고, 언어 방언만 진짜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구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잖아도, 얼마 전부터 방언에 대한 영상을 만들려고 생각했는데, 자매님의 메일이 도화선이 되어 이렇게 방언 시리즈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방언 시리즈의 첫 번째로 “랄라라 방언”과 “따다다 방언”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여러분 과연 랄랄라 방언과 따다다 방언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우리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방언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성장 과정을 알 때, 두 방언에 대한 분명한 차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방언은 어떤 과정을 통해 성장하느냐?
방언은 랄라라 방언에서 시작하여 언어 방언, 능력 방언, 새노래 방언, 방언 통변이나 예언의 단계로 발전합니다.
이 방언의 성장 과정 중에, 랄랄라 방언과 따다다 방언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방언들은 어느 단계에서 나타나는 걸까요?
랄랄라 방언은 앞에서 말했듯이 방언이 처음 임할 때 나타나는 방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방언을 “애기 방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방언을 시작할 때, 처음 나타나는 방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점차 다음 단계로 방언이 성장합니다.
그렇다면, 이 랄랄라 방언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유익을 고린도전서를 통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고전 14:4, 개정)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여러분,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합니다.
그럼 여러분, 사도 바울이 말한 이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우리는 헬라어 원어를 통해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 “덕”은 “오이코도메오”로서 “집을 짓다, 건물을 세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것은 “신앙의 자기 집”을 세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방언을 통해 신앙의 집인 믿음을 견고히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랄랄라 방언을 말할 때, 이것이 단음절일지라도 믿음의 집이 견고히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방언을 지속할 때,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지며, 이 방언이 언어 방언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방언을 받을 때, 처음에 랄랄라 방언이 아니라, 언어 방언을 하시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러면 방언을 시작할 때, 랄랄라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건너뛰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미 그런 사람들은 신앙적으로 믿음의 집이 견고히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방언을 받을 때는 바로 언어 방언을 하든지, 잠깐 랄랄라 방언을 하다가 언어 방언으로 건너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방언을 할 때는 랄랄라 방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언어 방언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다면, 랄랄라 방언이 처음 방언이고, 우리의 믿음을 세우는 방언이라면, 두두두 따다다하는 방언은 어떤 방언일까요?
이 따다다 방언은 언어 방언이 성장하여 “능력 방언”으로 바뀔 때 나타나는 방언입니다.
우리의 방언은 랄랄라 방언에서 언어 방언으로 능력 방언으로 성장합니다. 능력 방언으로 성장할 때, 따다다 방언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언어 방언에서는 이것이 나타나지 않고 능력 방언에서 이것이 나타나느냐?
우리가 언어 방언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언어 방언의 역할이 무엇이냐?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방언은 이 언어 방언에 속합니다. 언어 방언은 보통 “대신 방언”과 “대인 방언”으로 나뉘는데,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방언은 “대신 방언”에 속합니다. 방언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는 “대인 방언”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방언을 어디에서 볼 수 있느냐? 사도행전 2장의 마가다락방의 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방언이 임했을 때, 사람들이 알아듣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대인 방언입니다.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방언인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무슨 방언을 하는지 모르는데 듣는 사람이 알아 듣는 것입니다(행 2:8-11).
몇 년 전 선교팀과 함께 원주민 사역을 갔습니다. 원주민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말로 기도할 수 없었기에,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원주민이 우는 것이었습니다. 물으니, 하나님이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딸이란다”라고 방언을 알아 들은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특별히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대인 방언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대신 방언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이것이 언어 방언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외에도 언어 방언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일반적인 육성의 기도는 ‘혼’이 주체가 되어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방언 기도는 어떻습니까? 방언은 성령님이 주시는 기도 언어입니다(행 2:4, 10:45-46, 19:6). 그래서 방언 자체에 이미 “영적 권세”와 “기름부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방언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한다면 어떻게 되느냐? 영적인 갑주가 우리에게 입혀지게 됩니다.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성령님이 주신 것이므로 방언으로 기도할 때, 영적인 갑주가 입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계속 기도할 때, 이 전신갑주가 더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언어 방언이 능력 방언으로 바뀌며 이때 두두두 따다다 하는 방언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랄랄라 방언이 ‘애기 방언’이라면, 두두두 따다다 방언은 ‘전투 방언’인 것입니다. 영적 전쟁을 위해 주어지는 방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우리를 통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영적 전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언어 방언을 통해 영적 전신갑주가 견고해졌을 때, 능력 방언을 통해 전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말하지 않습니까?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구요. 이것을 위해 우리가 언어 방언(대신 방언)으로 계속 기도할 때, 영적인 전신갑주가 입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견고해 질 때, 이 사탄의 세력과 싸울 수 있도록 능력 방언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저의 한 영상 콘텐츠에 이런 댓글을 남기셨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지 거의 4년이 되었는데, 성령님께 하나하나 가르쳐주셨다구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록했는데 이것이 전신갑주라는 것을 알았다구요. 그러면서 자신은 아직 “두두두 따다다” 방언을 해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성령님이 방언을 통해 이 분에게 4년 동안 영적인 전신갑주를 입히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두두두 다다다 방언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 능력 방언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지속적으로 더 방언으로 기도하면, 능력 방언이 부어지고, 그때 두두두 따다다 하는 전투 방언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능력 방언을 받은 사람에게서는 왜 방언 중에 두두두 다다다 하는 방언이 나오느냐?
여러분,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혈과 육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들인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라구요.(엡 6:12)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런 악한 존재와 싸울 수 있을까요?
여러분, 우리는 양이고, 마귀는 우는 사자입니다(벧전 5:8). 그래서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사탄,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래서 제자들이 마가복음에 나오는 간질병 아이의 안에 든 귀신을 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막 9:18). 이것을 쫓아낼 영적인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귀신이 예수님 앞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가만히 계셨는데도, 예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혼자 꼬꾸라지며 거품을 물지 않습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제자들에게 없는 “영적 권세”가 예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은 이런 권세가 어디에서 나온다고 하십니까? “기도 외에는 이런 악한 종류가 나갈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막 9:29)
여러분 왜 기도할 때 이런 악한 영이 떠나게 될까요? 기도할 때 영적 권세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기도가 어떤 기도입니까?
식사 기도입니까? 대표 기도입니까? 주시옵소서하는 간구기도입니까?

여러분, 영적 권세를 일으키는 기도가 어떤 기도이냐? 바로 “방언 기도”라는 것입니다. 방언은 성령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그 자체에 영적 권세와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할 때, 영적 갑주가 입혀지며, 영적 권세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방언이 능력 방언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갑주가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 능력 방언을 통해 사탄과 싸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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