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1965): 임오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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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mo Incident, also sometimes known as the Imo Mutiny, Soldier's riot or Jingo-jihen in Japan, was a violent uprising and riot in Seoul beginning on July 23, 1882, by soldiers of the Korean army who were later joined by disaffected members of the wider Korean popu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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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수 차에 걸친 군병들의 반항이 있었다. 1863년(철종 14)의 금위영 소속 군병의 소요, 1877년 8월의 훈국병 소요 등은 모두 군료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1882년 6월 5일 개항 이후 최초의 반봉건·반외세 투쟁이었던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일본식 군제(軍制) 도입과 민씨정권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구식군대의 군변(軍變)을 말한다.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점차 붕괴되고 대신 국내의 정세는 개국(開國)·개화(開化)로 향하게 되었다. 정권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守舊派)와 국왕과 명성황후 측의 척족(戚族)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開化派)로 양분, 대립하게 되었으며 외교노선은 민씨정권이 추진한 문호개방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제국(歐美諸國)과의 통상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은 더욱 심해졌으며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백성들을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거듭되었다.


이 사건은 무위영 소속 구훈련도감 군병들이 선혜청 도봉소에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급료로 지급하려던 관리들을 구타하면서 시작되었다. 6월 9일 동별영에 모인 군병들은 붙잡혀간 사람들을 풀어달라는 요구가 무시되자 흥인군 이최응, 선혜청 당상 민겸호 등을 살해하고, 포도청을 습격해 붙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했다. 별기군 교련장과 경기감영, 일본공사관이 습격당하는 등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고종은 흥선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다. 대원군은 정상적인 급료 지급을 약속하고 별기군을 폐지했으며, 5군영 체제를 복구시켰다. 사태가 수습된 후 일본 세력과 대원군 정권을 견제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청은 대원군을 납치하고 궁궐을 장악했다.



군란이 수습된 이후 고종의 유신 선언에도 불구하고 민씨척족정권은 구태의연한 정치풍토 속에서 정권 유지에만 급급하였다. 진정한 개혁은 실현되지 않았고, 다만 무정견한 개화정책만 되풀이되었다. 보다 주목되는 것은 군란 이후 청일의 압력이 가중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청나라는 군란 수습과정에서 보인 조처는 물론이려니와 이후 조선의 내정·외교 문제에 적극적으로 간섭해 이른바 종주권을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정부에는 척족과 개화파 관료계층 사이에 친청·친일정책의 두 부류가 생겨나 대립하여 결국 갑신정변이 야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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