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인문기행 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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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신묘한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써, 온 세상을 장엄하여 보배 궁전 만드네.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마침내 실다운 진리의 세계인 중도의 자리에 앉았으니, 예부터 변함없는 그 이름 부처로다.
의상의 법성게

의상은 억지로 웃음을 참고 원효가 내민 석간수 한 잔을 마시고 나서 다시 원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6년 묵언 수행한 원효의 얼굴은 맑고 평안해 보였다. 마치 설산에서 6년 수행해 깨달은 고타마 싯다르타 부처를 보는 듯했다.
”형님, 바깥세상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자, 당나라의 소위 선진 문물이라는 것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문화는 사라지고, 백성에게 좋은 것보다 우리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안 좋은 사치 문화들이 먼저 들어옵니다. 앞으로가 큰일입니다.“
원효는 눈을 감았다 뜨며 염주를 돌리며 말했다.
”사바세계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 다 인과응보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 나무아미타불.“
의상은 자기가 찾아온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형님, 이제 신국은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를 바탕으로한 화랑교육을 통한 인재양성과 국력신장은 한계에 도달한 듯합니다. 신국은 머지않아 당나라와 싸워야 합니다. 그럼 당을 알아야하고 당을 앞서는 인재는 물론이고, 앞서는 우리의 민족정신이 필요합니다.
특히 당으로부터 새로운 불교 이론이 들어와 모두들 배우느라 야단법석입니다. 지금 당나라 유학파나 유학중인 분이 원광· 지명· 현광· 자장· 원측· 신혜 스님이고 혜초· 혜엽· 혜륜· 현조· 현태· 법현· 송운· 현장· 의정· 구본 스님은 멀리 천축이나 토번까지 구법의 길에 올랐습니다.“
의상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구법승들의 법명을 줄줄 외웠다.
”형님, 대국통 자장 대사 모양 승관직으로 나라에 봉사하거나 선진이론을 바탕으로 민중교화에 이바지하는 이가 한둘이 아닙니다. 이제 이 땅에서 당나라나 천축을 갔다오지 않으면 법회에 초청도 받지 못 합니다.
형님, 저와 당나라 가서 신유식 공부를 좀 합시다. 백제가 망했으니 배를 타고 가면 고구려 땅을 거치지 않아도 갈 수 있습니다.
“당나라!”
원효는 귀가 번쩍했다. 6년 수행 기도를 한다고 절벽에 매달려 있었으니, 이제 세상으로 나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나라는 아니었다. 그런데 당나라라!
원효가 당나라에 구미가 당긴 것은 금강삼매경 때문이었다. 소문에 당나라 인명학의 대가 삼장법사 현장 스님이 금강삼매경을 천축에서 가져왔지만, 그 뜻을 해석하지 못해 창고에 처박아두었다는 것이다. 원효는 그 금강삼매경을 자신이 해석해 보고 싶었다.
원래 금강삼매경은 용궁에 있었는데, 용왕 검해가 이 경을 세상 밖으로 보내면서 분실을 염려해 사신의 장단지를 칼로 찢고 그 속에 서른 장 정도의 순서가 뒤섞인 산경을 넣어 세상으로 가지고 나왔단다.
원효는 “좋아, 해동원효 당나라 가서 금강삼매경을 해석하리라! 의상 아우 지금 당장 당나라로 가세.”
원효와 의상은 그 길로 걸망 하나 달랑 메고 당항성으로 길을 재촉했다.
(원효가 당나라 가지 않은 이유는 백두대간 인문기행 5화 해운풍류에서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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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은 혼자 당나라 종남산 지상사에서 화엄사상을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공부했다.
원래 화엄경은 10조9만5천48자였다. 용궁에 있던 것은 용수보살이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이 대방광불화엄경을 의상이 210자로 줄인 것이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 일명 법성게法性偈 라고 우리는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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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밤, 당나라 종남산 지상사에게 법계관문을 정리하고 있는 의상에게 신라 사람이 은밀히 찾아왔다.
“대사, 저는 신라 김양도 장군의 부관입니다. 지금 당 황제는 신라 김양도 장군을 감금하고, 30만 대군과 배 1,500척으로 신라를 총공격하려 합니다. 김양도 장군께서 빨리 이 사실을 의상대사께 알리라고 하였사옵니다.”
“오, 그러하오, 빈도도 요즘 심상찮은 당 고종의 흑심을 짐작은 하고 있었나이다. 마침 고국 신라로 돌아갈 참 이였소.”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당 고종이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 보장왕에게 항복을 받자, 당은 고구려 백성 20만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당나라는 고구려 땅을 신라에 귀속시키지 않고 아홉 개의 도독부와 42군으로 만들어 안동도호부를 두어 점령했다. 백제의 왕자 백관 대신 등 1만 2천명을 당나라로 잡아가고 백제에 웅진도독부를 두어 당나라 속국으로 삼았다.
이는 김춘추와 당태종 이세민의 나당연맹을 어긴 것이었다. 나당연맹에는 먼저 백제를 전령하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신라가 후방에서 식량을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삼국 통일 후 대동강 이남은 신라에 귀속시킨다는 약조가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 보장왕에게 항복을 받은 당 고종은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두어 신라까지 점령하려는 야욕을 보인 것이다.
당나라의 흑심을 미리 읽은 문무대왕과 김유신은 몰래 신무기를 개발하는 등 당나라 소정방 20만 주둔군과 일전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
다행히 의상에게 받은 정보로 문무대왕과 김유신은 먼저 매소성에 주둔한 20만 당군을 선제공격하고, 기벌포로 상륙한 당나라 설인귀의 5만을 막아내어 한반도에서 당나라 군을 완전히 쫓아내고 말았다.

문무대왕 15년은 평양에 있던 당나라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완전히 쫓겨나고 삼한 일통한 신라는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고국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혼자 백두대간 소백산을 타고 순례 중 이었다.
하늘은 높아 뭉게구름을 따라 백두대간 태백산에서 소백산 마루금을 걷다 보니 작은 산봉우리들이 연꽃처럼 피어나고 봉황이 날개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봉황산을 지날 때였다. 그때 높은 가을 하늘에 큰 돌덩이가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땅으로 점점 쏟아지듯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 밑 땅굴에 숨어 살던 사람들이 겁에 질려 모두 뛰쳐나왔다.
“하늘이 무너진다. 사람 살려!”
오백여 명의 무리들이 땅속 움막에서 마구 뛰쳐나오자, 바위는 요란한 벼락치는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놀란 의상은 땅 속에서 나온 사람들을 잡고 물었다.
“그대들은 누구시오?”
“예. 스님 저희들은 고구려 패잔병들입니다. 나라는 망하고 갈 곳이 없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숨어 풀뿌리로 겨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의상은 큰 바위가 하늘에서 떨어진 자리라 분명 보통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곳에 절을 짓도록 했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절을 짓도록 합시다!”
의상의 절을 짓는 다는 말에 고구려 패잔병들은 두 손을 들고 환호성을 질렸다.
오백여 명이 석 달간 공사하여 근사한 법당과 절이 되었다. 문무대왕을 비롯한 공경대부와 남녀노소가 한데 어울려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니 백두대간 소백산이 영산회상이 된 듯 변하였다.
의상은 사자 후를 토했다.
”500여 명의 일꾼들과 사부대중이 한 곳에 모여 화엄경을 듣게 되니 이것이 신라 화엄종의 대본산 부석사가 될 것이오!“

산은 백두대간 소백산이 봉황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으므로 봉황산이라 이름하고, 절은 하늘에 떠 있던 돌이 내려앉아 터를 잡았으므로 부석사(浮石寺)라 이름 지었다.
하지만 의상은 걱정이 하나 있었다.
“절이 잘 지어져 대중이 살기는 편안하게 되었으나, 이 많은 사람들이 마실 물이 넉넉지 못한 걱정이로구나.”
그날 밤 꿈에 의상을 사모한 선묘 낭자가 나타났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스님. 법당 마루방 밑에 저의 몸체가 숨어 있으니, 저의 가슴을 톡 치면 감로수가 나올 것이니 3천 명은 먹고 남을 것이 옵니다.”
날이 밝자 의상은 법당 마루방을 뚫고 내려가 보니 용 비늘같이 선명한 큰 바위가 깔려 있었다. 의상이 가슴팍에 부풀어 오른 젖꼭지 같은 바위를 살짝 건드리니 샘물이 펑펑 솟아 나왔다.
의상은 두 손을 모으고 감사했다.
“이는 필시 선묘 아가씨의 원력이요 사랑의 힘이로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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