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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 1890-1981)는 동서양 종교와 사상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한국적 종교 사유를 독창적으로 표현했던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자입니다. 동시에 다석 류영모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철저한 신앙적 수행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고 성령에 대해 생각하고 진리를 치열하게 탐구했던 그리스도교 사상가입니다.
류영모라는 이름 앞에 붙은 다석이라는 호는 많은(多) 저녁(夕)을 의미하는데,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루에 저녁 한 끼를 먹는다는 뜻으로 무절제한 탐욕으로 흐르기 쉬운 식욕과 성욕 같은 욕망을 절제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 그의 삶을 설명합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 이성과 물질세계가 아닌 정신세계와 신비를 은유적으로 저녁이라 묘사하는 그가 평생 추구한 영성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류영모는 많은 저녁을 뜻하는 다석(多夕) 류영모라 불립니다.
무엇보다 다석은 동양과 서양의 사상을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융합하여 한국의 지성과 영성의 창조적 제소리를 일군 동서회통의 기독교교양인이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자신의 사상을 35년간 YMCA 연경반 모임에서 가르침으로써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선 실천적 지식인이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교양인으로서 다석 류영모의 일생을 순차적으로 네 가지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로, 다석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근대 서구 문명을 수용한 기독교교양인이었습니다. 1890년 3월 13일 서울 숭례문 근처에서 태어난 다석 류영모는 15살이 되던 해인 1905년에 당시 YMCA 총무였던 삼성 김정식에게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입니다. 다석은 5세에 천자문을 습득하고 15세에 『맹자』에 심취할 만큼, 당시 조선의 지식인이라면 기본적으로 익혀야 했던 한학에 대한 공부 뿐 아니라 경성학당, 경신학교와 같은 근대적 교육 기관에서 수학, 물리학, 천문학 등 다양한 서구 근대 문물들을 배웠습니다. 투철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다석은 20살이 되던 1910년에는 함석헌을 비롯한 한국의 위대한 인물들을 길러낸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의 권유로 오산학교에서 교사로서 가르치는 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2년 후인 1912년에 오산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일본에 있는 동경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공부하게 됩니다. 이때, 다석은 무교회주의의 창시자라 할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의 강연을 들으며 견문을 넓힙니다. 이 시기의 다석은 견고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동서양의 교양을 두루 갖춘 기독교교양인으로 성장합니다. 훗날 다석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정신은 모세와 예수, 그리고 공자와 맹자로 영향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합니다. “동양 문명의 뼈에 서양 문명의 골수를 넣는다.”
두 번째로, 다석은 죽음을 통해 생명을 추구한 생명철학의 기독교교양인이었습니다. 다석은 언제나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그의 성장 과정을 보면, 다석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하여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 후, 1910년에는 그의 아우였던 류영묵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다석에게 죽음은 존재론적 충격이었고, 실존적 문제였습니다. 다석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과 함께 오늘의 삶에 집중하는 생명철학을 추구합니다. 그는 서구 철학과 성경, 불경, 도덕경과 같은 동서양종교경전을 공부하며 생명에 대해 깊이 탐구했습니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 다석은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통해서 무한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한 속에 있는 자리한 영원한 현재적 생명을 발견하는 길로서 ‘오늘, 여기, 나’라고 하는 ‘오늘 살이’에 집중하게 됩니다. 다석은 1918년 "오늘"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無數之點(무수지점)에 曠劫時間(광겁시간)에, 億兆人生(억조인생)이 살드래도 生(생)의 實相(실상)은 오늘, 여기, 나에서 볼 뿐이니라.” 즉, 셀 수 없이 많은 곳에서 지극히 길고 긴 시간 속에 많고 많은 사람이 살더라도, 생명의 참 모습은 영원 속의 순간인 오늘, 무한 속에 한 공간인 여기에 존재하는 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다석은 그리스도교 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생명 완성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폭넓은 사상적 지평을 갖추게 됩니다. 다석은 이렇게 말합니다. “석존은 생명 완성을 성불이라 하였고 ... 공자는 생명 완성을 성인이라 하였고 ... 예수는 생명 완성을 천부의 완전하심과 같이 되는 것이라 하였도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유교, 불교, 노장사상 및 서구철학을 통해서 형성된 그의 기독교교양학은 1928년부터 1963년까지 약 35년 동안 동서양 종교경전은 물론 다양한 철학사상을 연구하고 가르쳤던 YMCA 연경반(硏經班)을 통해서 구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연경반 모임은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적 인간이 나라를 세울 공적 인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줄 애국계몽운동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다석은 숨과 쉼, 그리고 저녁을 통해서 예수 신앙을 발견한 기독교교양인이었습니다. 빛을 쫓듯 동서양 사상을 두루 연구하고, 몸과 마음을 온전하게 만드는 수행적 삶에 집중으로써 적극적으로 생명을 추구했던 다석은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게 됩니다. 어둠과 같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한계 앞에서 다석이 발견한 생명의 새로운 차원은 세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숨, 쉼, 그리고 저녁입니다.
다석은 그의 사상적 변화를 뚜렷이 보여주는 중요한 글을 발표하는데, 그 글은 "저녁찬송"이라는 글이었습니다. 이전까지 다석은 생명을 ‘빛’으로 보고 날마다 오늘 여기의 삶에 집중하며 힘차고 뚜렷하게 살 것을 강조했지만, 이후로는 빛보다 어둠이 더 근원적이고 영원하며 커다란 실재임을 강조합니다. 다석은 1939년 『성서조선』에 기고한 "저녁찬송"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태양계에서 미와 힘의 대본이 태양이지만 태양도 물질이어니 우주의 한 작은 화로니라(광光은 우주 파동의 작은 부분). 정신은 물질보다 크다. 물질 이상이다. 공功을 감추는 미와 힘은 등장 속의 기름이요, 상賞을 타는 광영은 심지 끝의 불이니라. ... 처음도 저녁이요, 나중도 저녁이다. 처음과 나중이 한가지 저녁이로다 저녁은 영원하다. 낮이란 만년을 깜박거려도 하루살이의 빛이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아름다움과 힘, 물질과 영광 같은 생명이 가진 빛의 차원을 전부라 생각하지만, 사실 이러한 생명의 차원보다 더 근원적이고 영원하고 커다란 차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석은 그것을 은유적으로 ‘저녁’으로 표현했습니다. 동시에 다석이 발견한 것은 숨과 쉼의 영성이었습니다. 다석은 생명과 삶의 신비 그리고 성령의 말씀을 숨이라 표현했습니다. 모든 우주는 이 숨쉼 곧 호흡으로 하나의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기에 인간 안에서 하나님과 우주, 과거와 미래가 모두 숨으로 연결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다석은 숨을 쉬는 숨쉼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이라 보았고, 이 숨쉼이 가진 신비의 차원을 더욱 강조하게 됩니다.
이러한 저녁과 숨쉼의 존재론적 사유는 1943년 그의 중생 체험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예수 신앙으로 발전합니다. 다석은 자신의 도덕적 실천력, 생명 완성의 실천력을 가져다 주는 존재가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내린 성령임을 깨닫게 됩니다. 1942년 『성서조선』에 쓴 "부르신지 三十八年만에 믿음에 드러감"이라는 글에서 다석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生(생)이 重生(중생)한 오늘에 證據(증거)할 말슴은 「예수의 이름은 오늘도 眞理(진리)의 聖神(성신)으로 生命力(생명력)을 豊盛(풍성)하게 나리신다.」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석은 한국적 사유의 제소리를 가진 실천적 기독교교양인이었습니다. 1942년 중생 체험 이후 다석은 또 다시 1943년 2월 5일에 북악산에서 瞻徹天 潛透地(첨철천 잠투지) 곧 ‘우러러 하늘을 트고 잠겨서 땅을 뚫는다’는 신비 체험을 합니다. 이 경험 이후 다석은 한국 고유의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와 같은 경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는 한글의 천지인 철학과 한국종교사상 연구에 힘을 쏟습니다. 이렇게 다석은 자신의 신앙과 철학적 사유를 한국적 영성으로 종합하여 구성할 체계를 완성하게 됩니다.
다석은 자신의 일생 전체를 통해 이렇게 종합적으로 형성된 사상을 ‘제소리’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석이 추구하는 바는 자신 안에 이미 내려와 계신 하나님 그리고 한국에 이미 내려와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석의 사유는 1955년부터 본격적으로 식욕과 성욕을 끊고 삶의 유혹에서 벗어나 참 생명을 찾고자 하는 금욕적 수행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석은 그렇게 평생을 하나님을 찾고자 치열하게 수행하면서,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말을 YMCA 연경반에서 전하면서 남은 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1981년 2월 3일 가족들 품에서 숨을 거둡니다. 그가 마지막 숨을 내쉬며 했던 말은 ‘아바디’였습니다. 다석의 제자였던 김흥호 교수의 말에 따르면 아는 감탄의 말, 바는 밝다는 빛의 구현, 디는 디딘다는 실천적 삶을 뜻합니다.
다석의 마지막 말은 평생 그가 걸었던 길이 무엇이었는지 말해 줍니다. 저녁의 어둠을 통해 나타나는 없이-계신 '아바디'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쫓았던 다석의 삶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어둠을 통해 본 ‘빛’의 삶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되었습니다. 다석의 삶과 정신은 대중적으로는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다석을 주목하고 있는 오늘날 다석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수행적 삶으로 실천적 진리를 구현한 한국의 기독교교양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모범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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