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5.18 4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이름도 남김없이(Without leaving a name) 1부 "우리가 광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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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MBC 5.18 4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이름도 남김없이 (Without leaving a name) 1부 "우리가 광주였다"


‘외로운 광주’를 돕기 위한 세계적 연대가 가동되다


독일 공영방송 ARD-NDR 방송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취재물이 없었다면 40년 전 광주의 실상이 제대로 알려질 수 있었을까. 영화 '택시운전사'에서도 확인됐듯이 외신기자의 헌신과 용기가 없었다면 광주의 진실은 영영 묻혔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시 일본 동경에 머물고 있던 힌츠페터 기자는 어떻게 5.18이 일어나고 있던 광주로 오게 됐을까. 영화에서는 기자적 직감이 그를 광주로 이끈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결정적 제보자가 있었다.


힌츠페터 기자의 결정적 제보자는 바로 독일인 폴 슈나이스 목사였다. 1970년대부터 유신독재정권의 실상을 알리고 한국민주화운동세력의 든든한 지원자였던 슈나이스 목사는 박정희정권에 의해 강제 출국돼 일본 동경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5.17 군사쿠데타 움직임을 감지한 서울에 있던 아내로부터 연락을 받고 그 길로 힌츠페터 기자가 있던 ARD 방송국 도쿄지사 사무실로 찾아가 제보한 것이다. 슈나이스 목사는 이 뿐만 아니라 전두환 신군부가 봉쇄한 광주로부터 각종 성명서와 정보를 전달받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역할을 해왔다.


슈나이스 목사 뿐만이 아니다. 5.18 당시 광주에 머물고 있던 미국 평화봉사단원들도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외신기자들의 통역과 취재 지원을 담담했던 데이비드 돌린저씨는 광주MBC 취재진에 현재 논란이 5.18 헬기사격을 직접 목격한 사실을 증언했다. 돌린저씨는 또, 지금껏 베일에 가려져 있던 항쟁지도부의 마지막 외신기자회견에 참석해 윤상원 대변인의 마지막 발언을 들었던 목격자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판화가 도미야마 다에코씨 등 양심적 일본인들이 연대해 다큐멘터리 영상과 각종 예술작품 등으로 광주의 진실을 전파하기 위해 애를 썼다. 뿐만 아니라 한통련을 비롯한 재일교포들과 독일교포들을 비롯한 유럽의 동포들은 5.18이 일어난 직후부터 거리로 쏟아져나와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한국의 광주는 전두환 신군부의 만행으로 철저히 고립되고 봉쇄된 것처럼 보였지만 이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광주는 외롭지 않았다.


5.18 진압된 이후에도 광주를 알리기 위한 노력은 이어졌다.


특히 광주를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한 故 윤한봉 선생은 미국 LA와 뉴욕에서 시민단체를 설립해 광주의 진상을 알리고 모금활동을 펴는 등 살아남은 자로서의 책무를 다했다. 윤상원, 박관현 등을 두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 누구보다 시민운동에 헌신하면서도 편안한 삶을 추구하지 않았다.


5.18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광주정신의 가치에 매료돼 5.18 전도사를 자처한 故 서유진 선생의 고된 삶도 마찬가지다. 5.18이 민주주의의 교과서라며 독재정권에 신음하는 아시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광주정신을 전파했고 그 결과 2010년 5.18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쾌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같은 노력에도 윤한봉 선생과 서유진 선생은 어디에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5.18 기념재단을 창립하면서도 윤한봉 선생은 어떠한 직함을 맡지 않았고 서유진 선생도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폴 슈나이스 목사나 데이비드 돌린저씨, 도미야마 다에코 등의 인물들도 업적에 대한 인정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있음을 취재진은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어떠한 이유로 사회적 인정이나 보상, 평가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토록 광주를 알리기 위해 광주정신의 전파를 위해 헌신했던 것일까. 5.18의 대표곡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에서 차용한 다큐멘터리 ‘이름도 남김없이’(연출 김철원 기자 구성 김인정 작가)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레이션은 가수 하림씨가 맡았다.


광주MBC 5.18 40주년 다큐멘터리 ‘이름도 남김없이’ 1부(우리가 광주였다)는 2020년 5월 19일(화) 밤10시, 2부(그후로도 오랫동안)는 5월 27일(수) 밤10시에 방송될 예정이다.








■ 주요내용


(1부) “우리가 광주였다”


☞ “5.18 헬기사격을 직접 목격했다.”
- 전두환 광주재판의 핵심쟁점인 5.18 때 헬기사격과 관련해 이를 직접 목격한 미국 평화봉사단원을 찾아냈다. 데이비드 돌린저씨의 핵심 증언.

☞ “윤상원 대변인의 통역을 맡았다”
- 5.18 항쟁지도부의 마지막 외신기자회견의 내용은 죽음을 결의한 이들의 비장함과 용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그 통역을 누가 했는지가 베일에 가려져 있었는데 40년 만에 찾아냈다.

☞ “힌츠페터 기자의 결정적 제보자를 만나다”
- 영화 택시운전사는 독일 ARD 방송의 힌츠페터 기자가 직감에 의해 도쿄에서 광주로 온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힌츠페터 기자를 광주로 가게 만든 결정적 제보자가 있었다. 한국민주화운동의 결정적 제보자인 독일인 목사 폴 슈나이스를 직접 만나 당시 상황을 취재했다.


(2부) “그후로도 오랫동안”


☞ 5.18 마지막 수배자 故 윤한봉 선생은 미국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동포사회에 광주정신의 씨앗을 뿌렸는데 그 씨앗이 싹을 틔워 오늘날 거대한 나무가 되었다.


☞ 5.18 전도사 故 서유진 선생의 경우 광주와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광주의 진실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자처했다. 아무 보상이나 대가도 인정도 바라지 않고 헌신한 그의 일생을 추적한다.

☞독일과 일본의 교포들 역시 5.18 직후부터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를 봉쇄하고 고립시키려 애썼지만 그 노력을 못쓰게 만들어버린 시민들의 교포들의 노력을 재조명한다.


■ 방송일


1편 우리가 광주였다 2020년 5월 19일(화) 밤 10시 광주MBC-TV
2편 그후로도 오랫동안 2020년 5월 27일(화) 밤 10시 광주MBC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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