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영 목사가 서재에서 전하는 말씀 71 십계명은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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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십계명은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리고 애굽을 탈출한 후에, 그들은 시내 산으로 향했습니다. 시내산은 남동쪽에 있었고, 그들이 가려던 가나안 땅은 북동쪽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시내산은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와는 다른 방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왜 그곳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리고 갔던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니까. 갈 길은 멀고 험난해서 마음은 조급 했겠지 만 그리로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 모세의 설교라고 알려진 구약의 신명기가 전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두 개의 돌 판에, 그 십계명을 새겨서 모세에게 주셨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열 계명을 보면 앞의 네 계명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고, 그 뒤에 나오는 6개의 계명은 이웃과 나와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앞에 있는 4개의 계명은 나 자신의 완성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실 때의, 그 일그러지지 않았던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여섯 개의 계명은, 건전한 공동체 형성의 기초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것을 십계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 못 부쳐진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키기 가장 어려운 열 가지' 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그게 그렇게 괴변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 마음 속으로 라도 간음하지 않는 것, 일주일이라는 주기를 만들어서 개미가 체 바퀴 돌듯 하는 우리 삶의 고리를 한 번씩 끊고, 하나님 생각을 하면서 나를 돌아보는 것,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 사실 따지고 보면 말이 그렇지, 이 모든 것들은, 지키기가 쉽지 않은 것 들입니다. 하기야 지키기가 쉬우면 구태여 계명이라는 이름이 붙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이 인간처럼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일이,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을 터인데, 왜 12계명이나 50 계명이 아니고 하필이면 10계명이냐고 묻기도 합니다. 실은 나도 그 정확한 답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손가락이 열 개이니 기억하기 쉽게 십계명을 주신 것이 아니냐 고 추측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유대교 회당에 들어 가보면, 십계명을 돌 판에 새겨서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교에서도 이 십계명은 영적으로 아주 중요한 계율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에도 오계라는 것이 있는데, 십계명과 그 내용이 대동소이 합니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분은, 그렇다면 불교에는 왜 오 계명 뿐이냐고 묻고 싶으시겠지만, 모르기는 해도 부처님은 양 손 대신에 한 손만 펴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마가복음 5장17절을 보면, 예수께서도 십계명의 중요함을 역설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물론 여기서 선지자를 폐한다고 하는 표현은,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완전하게 한다는 것은 완성한다,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십계명은 그 믿음이 유대교이건, 불교이건, 이슬람교이건, 기독교이건 간에, 우리의 삶을 풍요하고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종교라는 것이 다 무엇입니까? 유대교는 무엇이고, 불교는 무엇이고, 이슬람교는 무엇이고, 힌두교는 무엇이며, 기독교는 또 무엇입니까? 하지 말라는 것 안하고, 하라는 것 열심히 하면, 그게 종교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바르게 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집대성한 것이 종교입니까? 실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는 바리새라고 불리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 하지 말라고 하신 것 잘 지키며 살아 보려고, 안간힘을 다 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에서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하라, 아니면, 하지 말라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은 계명에 없습니다. 하기야 그런 것은 구태여 계명이라고 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종교가 무엇입니까? 왜 교회에 다니고, 왜 절에 다니는 것이며, 왜 하루에 다섯 번씩 앉았다 섰다 절을 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종교란 계명으로 푸는 것이 아니고 관계로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계명에만 정신이 팔렸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파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여러분은 출애굽기나 신명기에 나오는 십계명의 첫 마디가 무엇 인줄 기억하십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열 계명만 생각하다 보니 그 중요한 것을 잊은 것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 찬송가 뒤편에는 십계명을 넣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는데, 거기에도 보면 첫 계명을 말하기 전에, 그 말씀이 꼭 들어가 있습니다. 사실이지 엄밀히 따지자면 이것은, 10 계명중의 하나는 아니지만, 십계명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법이나 규정을 만들게 되면 그 앞에 서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이를 Preamble 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십계명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셈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소개하면서 자주 쓰시던 문구가 바로, '내가 너희를 노예로 살던 애급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이다' 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가 하신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치사하기 위하여 되풀이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스스로 선택하고 사랑하신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 위하여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십계명 밑에 흐르고 있는 주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계명은 속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고, 오래오래 더 많은 은혜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갈 삶의 청사진인 것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규정이나 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반항적인 본성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청개구리의 본성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을 보면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와 수평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웃과의 관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비율은 4대 6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2장 후반 절을 보면, 율법사라는 사람들이 무엇이 가장 큰 계명이냐고 예수께 질문을 합니다. 아마 십계명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조항이냐고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것이 첫째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 중, 두 번째 계명을 거론하면서 '그와 같으니'라는 접속 구를 사용하고 계시는데, 실로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떼어 놓을 수가 없는 하나라는 암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이웃을 미워하고,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한다면, 이것은 역설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생각하며 지키기 전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계명의 서언이며 정신입니다. 십계명은 잘 지키면 복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계명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자연스러운 우리의 표현이며 응답일 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원리를 거꾸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십계명은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게 하는 조건이 아니고, 하나님 사랑에 대한 자연스러운 우리의 반응일 뿐입니다. 자녀들에게, 너희들이 이것 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하겠다는 부모 보셨습니까? 어린 아이들에게 사탕 주는 것을 절제하는 것은 사탕이 아깝다 거나, 그들이 미워서 가 아니고, 아이들의 이가 상할까 보아 걱정이 되어서 가 아닙니까? 실은 구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흐르고 있는 주제는 바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셨는데, 그들에게 그 사실을 알아서 인정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진정한 관계도 그 관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하여 계명을 주셨는데, 축복은 그 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인간이 종교적인 극점에 도달하게 되면, 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경계가 희미하게 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나가 되어버린다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성 프랜시스와 같은 사람들이 그런 경지에 도달했던 사람들일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모르기는 해도, 불자들이 이야기하는 열반이라고 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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