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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사의 사자상
1821년 덴마크의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1770~1844)이 기획하고 루카스 아혼(1789~1856)이 1824년 완성한 작품으로 스위스 루체른에 세워졌으며 1792년 8월 10일 봉기 당시 튈르리 궁을 지키다가 단 한명도 남김없이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근위대를 기리는 조각이다. 사진으로 보면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저래봬도 길이 10m, 높이 6m에 달하는 대형 조각.
실제 크기가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는 사진. 처음 사진과 함께 보면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1]
2. 배경[편집]
사자는 죽어간 스위스 용병들을 상징하며 심장이 찔렸음에도 부르봉 왕조의 백합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지키고 있는 것은 왕실에 충성스러운 용병들의 모습을 찬양하는 것이라 한다. 사자상 위에는 "HELVETIORUM FIDEI AC VIRTUTI"라는 라틴어 명문을 새겼는데, '스위스인들의 신의와 용맹에 (바친다)'는 뜻이다.
당시 분노한 수만의 파리 군중들이 튈르리 궁으로 진격하던 시점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를 지키던 프랑스군 근위대마저 몽땅 도망간 상황이었지만 루이 16세가 고용했던 스위스 용병들은 단 한 명도 이탈하지 않고 혁명군에 맞서 왕을 지키다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처형당했다.
고용주인 루이 16세가 "그대들은 이만 철수해도 좋다"고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이 명령서는 전투가 한창인 중에야 뒤늦게 도착했다. 해산 명령을 확인한 후에도 방어가 무너지기 직전에 가서야 항복을 택했고, 사실상 패배의 순간까지 싸운 것이다. 해산 명령을 듣고도 싸웠다는 것은 과장이지만, 적어도 이미 시작된 전투에서 도망치지는 않았다
스위스 용병의 신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코 디 로마 때 전멸한 스위스 근위대의 이야기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일화인데, 당시 스위스인들은 용병업이나 알프스 산맥에서의 숙박업 외에 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용병으로서 전장에서 돈을 벌어야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그들이 도망가고 신용을 잃어 더 이상 용병일을 할 수 없게 되는 순간 가족들의 삶이 어떻게 될지 생각한다면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루이 16세의 해산령은 너무 늦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적어도 해당 명령이 하달되기 전까진 싸워야 했으며, 해산령이 전달된 후에도 민중들이 고용주에게 명백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철수해버리는 것은 무리였다. 고용주가 죽기라도 하면 적전도주가 아니었다고 증명해줄 사람이 없을 뿐더러, 설령 다른 증인이 있다고 해도 '스위스 용병 역사상 처음으로 적과 싸우기를 포기하고 고용주를 죽게 내버려둔' 불명예는 여전히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귀국해도 당연히 단체로 업계 영구 퇴출감이니, 고용주가 어찌되든 말든 나몰라라 하고 떠나기에는 스위스 용병들에겐 잃을 명성이 너무 컸던 것이다. 하다못해 이 혁명군이 포로를 마구잡이로 죽이기로 악명이 자자했으니 목숨 부지하자고 항복하기도 곤란했다.
숫적으로 압도적인 데다 대포까지 끌고 온 군중들이 당연히 스위스 용병들을 이기고 루이 16세를 끌어냈지만, 이 과정에서 용병들은 해산령이 하달된 후에도 최후까지 방어를 각오했기에 혁명군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렇게 해산령이 하달되기 전 까지 루이 16세를 지키기 위해 정말 단 한 명도 항복하지 않고 싸웠으며 이 과정에서 군중들도 수백여 명이 죽어나갔기에 말 그대로 궁전 일대가 피로 물들었고, 스위스 용병대는 해산령 전달 이후 궁전이 풍비박산 날쯤에야 뒤늦게 항복했다.
워낙 큰 손실을 보았기 때문인지 혁명군은 항복한 용병들을 전부 처형했다. 게다가 분노한 죽은 군중의 유족들이 몰려와 죽은 용병의 시신을 난도질하고 옷을 벗겨 거리에 매달고 반토막내기도 하고 신체부위를 잘라내서 거리에 매달아둘 정도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회고하길 당시 여자들이 스위스 근위대의 성기를 잘라 매달았기에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고 한다. 귀족이나 왕의 정규 군인도 아니고, 민중학살에 가담한 자들도 아닌 외국인 용병들이 받을 대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혁명의 광기들이 나폴레옹이 혁명에 질리게 만든 계기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나폴레옹은 국왕이 스위스 근위대를 제대로 지휘만 했다면 무도한 폭도들을 몰아낼 수 있었을 거라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평생 민중봉기를 두려워했고, 정권을 잡은 뒤에는 프랑스에서 최대한 혁명색을 빼내려 노력했다.
장 르누아르 감독이 제작한, 프랑스 혁명을 소재로 한 라 마르세예즈에서도 이를 다룬 장면이 나온다. 군중들이 튈르리 궁을 공격하려 하고 근위대도 도주하려 하지만, 정작 스위스 용병대는 의무를 다하겠다며 자리에 남는다. 한 근위대 장병이 '도망가라는 지휘관의 말 못들었나? 우리와 함께 몸을 피하자'라고 말하자 용병대 장병이 독일어 억양이 섞인 목소리로 '우리는 스위스 용병이다. 스위스 용병은 살아있는 한 무기를 버리지 않는다. 우리에겐 그런 치욕을 당할 여유가 없다. 우리에겐 도망도 항복도 있을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대꾸하는 모습도 나온다. 해당 장면
이후에도 스위스 용병들은 계약을 유지했다. 프랑스의 정부가 바뀌자 바로 그 정부에 용병을 보냈던 것이다. 뒤이어 나폴레옹과 계약을 갱신한 스위스 용병들은 러시아 원정에서 7천 명이 7백 명으로 줄어드는 순간까지도 전장을 이탈하지 않고, 나폴레옹이 철군한 뒤에야 함께 스위스로 돌아왔다. 나폴레옹을 배신하는 순간 받을 보복도 보복이지만, 전장을 이탈하는 순간 자손들은 용병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현실이 아닌 전설이 된 것은 스위스가 용병업 및 자국민의 타국 군대 입대를 아예 금지한 뒤의 일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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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펠교
카펠교(독일어: Kapellbrücke 카펠브뤼케[*], 문자 그대로 예배당 다리)는 스위스 중부의 루체른에 있는 로이스강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지붕이 덮인 나무 인도교이다. 근처 성 베드로 예배당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다리[1]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많은 내부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러나 1993년에 일어난 화재로 많은 부분과 수백 년 된 다리 대부분과 함께 파괴되었다. 화재 이후 복원된 카펠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지붕 다리이며[2][3],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트러스교이다.[4] 카펠교는 도시의 상징이자, 스위스의 주요 관광명소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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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프라우요흐 Jungfraujoch (독일어: "처녀 어깨")는 버니스 알프스 의 두 주요 4000 미터 고봉인 융프라우Jungfrau 와 묀히 Mönch 를 연결하는 능선이다 . 그것은 해발 3,463미터(11,362피트)의 고도에 있으며 스핑스의 암벽에서부터 직접 연결된다. 융프라우요흐는 알레치 빙하의 상부 눈 위에 있는 빙하 능선으로 융프라우 알레취 Jungfrau-Aletsch 지역이며 베른과 발레주의 경계, 인터라켄과 Fiesch 중간 지점에 있다.
1912년부터 융프라우요흐는 인터라켄과 클라이네 샤이텍에서 출발해 아이거와 묀히를 통과하는 터널을 통해 부분적으로 지하를 달리는 융프라우 철도를 통해 관광객들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해발 3,454미터(11,332피트)에 있는 융프라우요흐 기차역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철도역이다. 융프라우요흐 능선 동쪽, 스핑스 전망대 아래에 있으며 여러 개의 탁 트인 레스토랑, 상점, 어트랙션 및 우체국이 포함된 Top of Europe 건물과 연결되어 있다. 여러 개의 터널이 야외로 이어지며, 이곳에서 크레바스 빙하 위를 걷는 안전한 하이킹 코스, 특히 묀히요흐 Mönchsjoch 산장 하이킹과 융프라우(Jungfrau)와 묀히(Mönch)로 오르는 일반 하이킹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천문대 중 하나인 스핑스 기상 연구소(Sphinx Observatory)이자 스위스에서 두 번째로 높은 3,572미터(11,719피트) 높이로 이곳에서 추가적인 전망대를 제공한다. 융프라우요흐에서 초고속 엘리베이터로 닿을 수 있다. 이곳에는 세계 기상기구 전 지구 기후변화 감시 프로그램 Global Atmosphere Watch 의 대기 연구소 가 있다.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융프라우요흐 무선 중계국은 융프라우 능선의 융프라우요흐 서쪽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 유럽에서 가장 높은 무선 중계국 입니다 .[1]
개요
융프라우요흐는 해발 3,466m로 클라이네 샤이덱에서 융프라우 철도가 융프라우요흐역까지 연결되어 있다. 해발 3,454m에 위치한 융프라우요흐역은 유럽에서 가장 해발이 높은 철도역으로 유럽의 정상 ‘Top of Europe'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세계에서 연간 70만 명에 가까운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2012년에는 융프라우 철도 노선 개통 100주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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