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한국사전 – 흥선대원군, 왜 아들과 화해하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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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子의 엇갈린 부국강병의 길, 정치적 라이벌로 바뀌다!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고종의 친정을 요청하는 상소를 쓴다. 대원군의 축출문제가 공론화되고 대원군은 축출대상이 된다. 나라 문을 걸어 잠가버린 대원군 방식의 개혁은 일시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저지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서구 열강이 몰려드는 중요한 전환기, 고종의 개화정책에 걸림돌이 된다.
아버지의 쇄국정책은 고종에게는 끊임없이 넘어야할 산(山)이었다. 화선지에 의지하며 보낸 2년간의 양주 시절. 이때 칩거생활을 하던 대원군의 심경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있다. 대원군의 심경을 보여주는 노근란.
대원군이 ‘뿌리를 드러낸 노근란’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이다.

납치된 대원군을 내버려 둔 아들 고종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군인들은 대원군을 찾아가 사태해결을 요구한다. 사태수습을 위해 9년 만에 아버지와 아들이 만났다.
그러나 임오군란의 주모자로 여겨진 흥선대원군은 정국 수습 후 33일째 되던 날, 청나라 군대에 의해 중국의 천진으로 납치되고 만다. 고종은 아버지의 송환을 위한 교섭을 하는데 별다른 의욕이 없었다. 대원군의 안부를 묻는 문후관을 간간이 보냈을 뿐이다.
오히려 고종은 대원군이 연금되자 아버지의 정책을 폐기하는 기회로 삼는다. 흥선대원군은 기약 없는 연금생활 속에서 향수병에 시달린다. 그는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지만 억류생활 동안 풍토병에 걸렸을 정도로 힘겨워했다고 한다. 아버지 없이 고종은 세계와 통상하고 그들의 문물을 이용해 부국강병을 이룰 것을 천명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정치적으로 결코 좁힐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며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가택연금, 암살기도, 운현궁엔 찬바람만 떠돌았다
억류에서 풀려난 흥선대원군은 쇄국을 주장하던 예전과 달리 연이어 주한 외교사절단을 거처인 운현궁으로 초대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를 선보였다.
그런데 불과 며칠 뒤 고종은 운현궁 대문을 횡강목으로 걸어 잠갔고 대문 밖에 관원을 배치시켜 운형궁 출입을 통제했다. 대원군의 기약이 없는 가택연금으로 사람들로 붐비던 운현궁은 바람만 떠돌았다. ‘매천야록’은 이 시기에 대원군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침입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사고도 일어났다고 전한다.

외세를 등에 업고, 손자를 내세워 역모를 꾀하는 대원군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은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친일 개화파 정권을 수립한다. 일본군은 대원군을 끌어들였다.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기막힌 부자의 만남’, 대체 무슨 생각으로 대원군은 일본과 손을 잡고 친일파 내각에 참여한 것일까?
동학당농민운동을 다룬 일본 측 보고서에는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의 이름이 등장한다. 고종실록에도 실제 이준용이 역모 혐의로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된 것으로 나와 있다. 다시 말해 대원군은 고종을 끌어내리고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려고 한 것이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끝없는 불신감, 대원군의 엄청난 정치적 우월감, 그것은 그들의 끊임없는 싸움의 원인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사망
대원군은 친일내각에 참여한 지, 4개월 만에 물러났다.
스스로 일본을 이용한다고 생각했던 대원군은 오히려 일본에 이용당함으로써 아들 고종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다.
명성황후 시해 누명까지 쓴 대원군은 운현궁에 또다시 유폐됐다.
운현궁은 대원군의 유배지였다. ‘뮈텔주교의 7월 그믐날 일기’에는 대원군이 고종과 만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서로 다른 국정철학으로 인해 대립과 갈등에 모든 것을 소진한 나머지, 위기의 조선에 있어
부국강병은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는 개인의 비극을 넘어 개항기 우리 역사의 비극이었다.

한국사전 56회 – 흥선대원군, 왜 아들과 화해하지 못했나 (2008.9.20. 방송)
http://histor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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