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 신앙의 출발점 충남 '솔뫼성지'에 가다[천지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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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 신앙의 시작점인 '솔뫼성지'
소나무가 많아 산을 이뤘다는 뜻의 솔뫼성지(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46호). 김대건(金大建, 1821~1846) 신부가 태어나 7살이 되던 해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으로 옮길 때까지 살던 곳이다.

이곳은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해미에서 순교),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본명 김한현, 1816년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 아버지 김제준(1839년 서울 서소문밖에서 순교) 등 4대의 순교자가 살았으며, 이 집안에서만 11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현장서 발굴된 기와조각 등을 토대로 고증을 거쳐 2004년 생가를 복원했다.

이 외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성당 및 기념관, 솔뫼 아레나(원형공연장 겸 야외성당), 십자가의 길 등이 있다. 성지 가득한 소나무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곳으로 순례객과 관광객을 위해 잘 꾸며놓았다.

김대건 신부는 16세 때 최양업·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갔다. 그는 라틴어와 불어, 영어, 중국어까지 5개 국어에 능통했다.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고 1845년 조선으로 돌아와 선교활동을 하다 1년여 만에 군문(軍門)효수형(목을 베어 군문에 높이 매달아 놓는 형벌)에 처해졌다.

◆조선의 카타콤바 '신리성지'
솔뫼성지 근처에는 합덕성당과 신리성지 등이 있어 이들 성지를 걸어서 순례할 수 있는 버그내 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내포 지역의 첫 성당인 합덕성당(충청남도기념물 제145호)은 1890년 예산 양촌성당에서 출발해 1899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 1929년 지금의 모습으로 신축됐다.

충남지역 천주교의 중심지 내포 공동체는 박해가 있을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가 나온 곳이다. 특히 '조선의 카타콤바(로마시대 비밀교회)'로 불리는 신리성지는 400여 명의 신자들이 신앙공동체인 교우촌을 형성했던 곳이다.

천주교 서적을 번역하는 등 한국천주교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성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가 손자선의 집에서 수년간 거처하던 곳이다.

현재 당진시는 솔뫼성지 성역화사업, 신리성지 정비사업, 버그내 순례길 조성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교황 방문을 계기로 이 일대를 문화 관광지로 조성하고 있다.

◆100여년간 박해가 이어지던 곳
한국천주교의 초기 100년은 실로 박해와 순교의 역사였다.

그 후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중국)를 비롯해 이승훈, 정약종 등이 사형된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 순조 1년),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를 처형한 병오박해(丙午迫害, 1846년, 헌종 12년) 등이 있었고, 가장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지속됐던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년, 고종 3년) 때는 프랑스 외방전교회 출신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됐다.

이 때 천주교 신자는 대략 8000명에서 1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는데 그중 대부분은 무명 순교자이다.

천주교 박해는 내포 지역이 심했는데 당시 해미현에 군사를 거느린 무관영장이 지역통치를 겸한 막강한 권력을 남용해 중앙의 시책과는 무관하게 박해를 가했다. 충남 서산에 있는 해미성지와 해미읍성은 천주교 박해 역사가 남아 있는 곳이다.

해미순교성지는 특히 생매장 순교지로 유명하다. 당시 내포지역 천주교 신자들은 사약, 몰매질, 교수형, 참수형 등을 당했는데 생매장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 방법도 사용됐다. 해미성지에는 발굴된 유해를 전시해놓은 기념관과 진둠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끌려오던 교인들이 "예수, 마리아"를 외치는 것을 사람들이 '여수머리'로 알아들어 '여숫골'로 불렀다는 이곳은 당시 충청도 각지에서 끌려온 천주교 신자 1000명 이상이 생매장 당한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근처에 있는 해미읍성(海美邑城, 사적 제116호)은 조선시대에 건축된 성 중에서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또한 3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로 처형당한 순교 성지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성 안에는 천주교 신자를 가두고 고문했던 옥사가 남아 있다. 이 감옥터에는 손발을 묶이고 머리채를 묶인 교인들이 매달려 고문대로 쓰이던 호야나무가 지금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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