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침략#왜구침구#토착왜구
지난 시간 한반도에 침입한 외적의 문제와 일본의 침략과 침구에 대해 말씀드렸는데요.
오늘은 고려사·태조실록 등의 사료를 근거로 추산한 횟수가 대략 720여 회에 달하는 왜구의 침구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왜구가 저의 전문 연구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전사편찬위원회, 국방군사연구소)가 1993년에 발간한 왜구토벌사 등의 공간사(公刊史)를 기본자료로 하고, 이영 교수, 나종우 교수 등 이 분야를 평생 전문으로 연구하신 분들의 자료를 인용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왜구라는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기록은 414년에 건립한 광개토대왕 비문입니다.
그 후 고려시대에 편찬한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는 박혁거세 8년에 “倭人行兵 欲犯邊” 즉 왜구가 나타나 변방을 침범하려 했으나 되돌아 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박혁거세 8년은 신라 건국 후 8년이니까 BC50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왜(倭)는 최초에 인접국을 의미하는 용어였지만 점차 바다 건너 일본을 지칭하는 명칭이 되었고,
왜구는 왜(倭)와 구(寇)의 합성어로, 구(寇)는 떼도둑(群賊), 또는 겁탈함(劫取)을 뜻합니다.
따라서 왜구는 ‘일본인에 의해 저질러진 집단 침구 행위를 의미합니다.
같은 의미로 우리의 역사에는 기록이 없지만, 일본의 기록에는 많은 ‘신라구·고려구’가 등장하는데,
신라인, 고려인이 일본에 침입해 저지른 약탈, 노략질 행위를 뜻합니다.
신라구와 고려구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왜구의 최초 침구는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에 11년 병선 1백여 척 규모의 왜구가 신라 해변의 민호(民戶)를 침입해, 신라가 육부 군사를 동원해 격퇴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신라본기 11년은 서기 14년에 해당하며, 병선 1백여 척의 병력 규모는 1척당 승선 인원을 10명 정도로 계산할 때 1천여 명 규모로 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백제·신라가 병립했던 삼국시대에 유독 신라, 즉 경상도 일원에만 왜구의 침구가 심했으며, 서기 14년부터 781년까지 34건의 침구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신라가 지리적으로 왜와 가깝다는 점과 신라와 왜의 대외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781년 이후 신라 말기에는 청해진(莞島)에서 장보고(785~846)의 활약이 시작되면서부터 왜구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그 후 왜구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 1223년까지와 두 차례의 일본 정벌(1274, 1281)까지 500여 년간, 해상의 주도권을 신라-고려가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장보고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려 말기가 되면서 왜구가 다시 기승을 부리게 되는데, 400여 년 동안 잠잠하던 왜구가 다시 나타난 것은 1223년 김해를 침구한 왜구였습니다.
그 후 1323년까지 100년 동안 12회 정도를 침구했던 왜구는 1350년이 되면서 10회(6회)를 침구하고 계속 증가해 1377년 한 해에는 67회나 침구해 1350년 이후 고려 말까지 침구 횟수가 600여 회에 이르렀습니다.
왜구의 침구가 급격하게 늘어난 1350년이 경인년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고려 말까지 왜구를 ‘경인(庚寅)년 이후 왜구’라고 합니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에도 왜구의 침구는 고려에 비해 줄어들었지만 계속됐으며,
태조시기 38회를 비롯해 세종대까지 100회 정도의 침구가 있었습니다.
왜구의 규모에 대한 기록은 병력 수가 아닌 선박의 숫자로 표기하고 있는데 매번 수십 척에서 수백 척에 이르렀으며,
1380년 금강 하구로 침구한 왜적을 최무선이 화포로 격멸했던 진포대첩은 왜선 500척을 불사르고, 격침했다고 태조실록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선박은 대략 10~20명 정도가 승선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500척의 왜구는 최소 5천여 명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왜구의 침구는 수백 명에서 수천 명 규모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구의 침구 형태 역시 워낙 다양해서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용어부터 침구, 또는 침입이나 침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기도 하는데 그 해석이 다양합니다.
우선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그리고 청일전쟁으로 시작해 경술국치까지 일본의 침략(侵略)은 조선의 영토와 국권을 차지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왜구는 전쟁에 버금가는 규모의 침략도 있었지만, 대부분 국권을 차지하기보다는 약탈 위주의 침구였다는 것입니다.
침입 후 아예 현지화, 즉 토착왜구로 정착하는 경우도 있고, 현지 주민이 왜구와 연합한 사례도 있습니다.
현지 주민과 왜구의 연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 드리면,
고려 우왕 시대부터 살기가 힘든 천민층, 즉 화척(禾尺)이나 재인(才人) 등이 왜구와 결탁하거나, 왜구를 가장해 관가를 습격하거나 민가를 약탈하는 행위들이 상당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구를 가장한 현지 주민의 봉기를 가왜(假倭) 또는 장왜(裝倭)라고 하는데,
가왜·장왜와 현지화한 왜구, 즉 토착왜구의 악랄함이 원래의 왜구보다 훨씬 더했다고 합니다.
그 시기 토착왜구의 사례는 최근 등장한 토착왜구 용어에도 시사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왜구를 연구하는 일본의 학자들은 왜구의 대부분을 고려의 현지 반란세력이 왜구를 끌어들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극히 부분적인 사건을 침소봉대한 것으로 왜구 발생의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의 내부 문제에 있습니다.
바로 일본의 남북조(南北朝) 전쟁이었습니다.
일본에서 1336년부터 남북조(南北朝)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열도에 두 명의 덴노(천황)가 존재했던 시기로 교또, 오사카 중심의 북조(北朝)와 요시노, 큐슈섬 중심의 남조(南朝)가 등장하면서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두 세력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군량이 부족한 큐슈의 남조 세력 중 대마도와 연계한 세력이 왜구(倭寇)가 되어 한반도로 침구(侵寇) 즉 침입해 노략질을 계속한 것입니다.
조선이 건국한 해인 1392년 일본의 남북조(南北朝) 전쟁이 북조의 승리로 마무리됐지만 패배한 남조의 잔당들은 해적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이런 일본의 상황이 왜구를 만든 것입니다.
이 왜구들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베트남, 필리핀, 심지어 인도네시아까지 침구한 기록도 있습니다.
한반도의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선조 때의 임진왜란 전까지 계속된 왜구의 전체 침구 횟수는 얼마나 될까요?
왜구의 침구 규모, 침구 형태 등이 워낙 다양하므로 판단하는 관점에 따라, 또는 인용하는 자료에 따라 연구자마다 상이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1380년 최무선이 함포를 사용해 격파했던 진포대첩의 왜구는 500척 규모나 되었지만, 작을 때는 20~30여 척에 불과할 때도 있었는데,
각각을 동일한 횟수, 즉 500척도 1회, 20척도 1회로 산정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구의 행태, 피해, 우리의 대비태세 등을 위해 침구 횟수를 산정할 필요성은 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분석하여 산출합니다.
이어 일본 측 자료를 통해 대조하기도 하고, 당시 정황 분석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저는 왜구 전문 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모두 직접 담당할 수가 없어, 평생 그 분야를 연구하신 분들의 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원광대의 나종우 교수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고려사 등의 자료를 심층 분석해 1223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시대 왜구 침구 횟수를 529회로 제시했습니다.
방송통신대 이영 교수는 최근에 발간한 저서에서 1350년 경인년부터 1392년까지 왜구 침구 지역을 기준으로 637회로 산출하고 있습니다.
국방부의 왜구토벌사는 침구 숫자를 대신해 연표를 제시했습니다.
연표에 의하면 1223년부터 1350년 이전까지 침구를 12회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침구 횟수가 가장 많은 이영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고려시대 왜구 침구는 경인년 이후 637회에 경인년 이전 12회를 더해 649회가 됩니다.
나종우 교수의 연구와 대략 120회 정도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같은 기록을 보면서 연구한 연구자의 왜구의 침구 횟수 산정이 다른 이유는 연구자의 판단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왜구가 해안에 출몰했다가 상륙하지 못한 경우, 고려군이 출동해 격퇴한 것이라면 당연히 횟수로 산정해야 하겠지만,
그들 스스로 물러간 것이라면 산정할 것인지 말 것인지 모호합니다.
그런데 사료에는 고려군이 출동해 격퇴한 것인지, 스스로 물러간 것인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또한, 왜구가 한반도의 도서를 점령한 후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본토를 수차례 침구한 사례도 있어 각각의 횟수가 다를 수 있습니다.
당시 국방부의 연구에 참여했던 이재범 전 경기대 부총장께 문의한 결과 그런 이유로 국방부는 횟수를 산정하지 않았다고 답변해 주셨습니다.
저는 여러 자료를 종합한 결과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인용하고 있는 숫자를 기준으로, 삼국시대 34회, 고려시대 515회, 조선시대 176회, 합해서 725회, 대략적인 횟수 요약해 720여 회로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720여 회라는 숫자보다는 왜구의 실체를 이해하고, 그것의 현대적 의미를 파악해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 드린 말씀의 결론입니다.
왜구의 한반도 침구는 결국 1592년의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이어졌으며, 300년 후 1894년의 청일전쟁, 1904년의 러일전쟁,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의 치욕까지 연결되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은 다양한 방식에 의한 일본의 공세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 한반도를 침구했던 왜구는 오늘날에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보며, 이에 대한 경계와 대비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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