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스페셜 – 8.15기획 무장투쟁의 길,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 박용만 / KBS 20120816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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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10월, 베이징에서 암살당한 독립운동계의 거물. 독립지휘관을 양성하기 위해
해외에 최초로 한인무관학교를 창설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 ‘박용만’ 그는 사후 67년 만에야 독립유공훈장에 추서됐다. ‘외교론’의 이승만, ‘실력양성론’의 안창호와 함께 미주지역의 3대 독립운동가로 일컬어졌던 박용만, 그의 불꽃같은 삶을 재조명한다.

■ 미 대륙에 해외 최초의 무관학교, ‘소년병학교’를 세우다
1909년, 미국 네브라스카주 커니市. 박용만은 이곳에서 해외 최초의 무관학교인 ‘소년병학교’를 세웠다. 왜 그는 이역만리 미국 땅에 군사양성학교를 세웠을까? 소년병학교를 세웠을 당시 국내의 의병전쟁은 쇠퇴하고 있었다. 이를 인식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투쟁의 방법을 새로이 모색하고 있었다. 무장투쟁론자였던 박용만은 소년병학교를 통해 장차 만주와 러시아에서 독립전쟁을 지휘할 군관을 양성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소년병학교는 1914년 폐교될 때까지 사관생도 170여 명을 교육시켰다. 이들 대부분은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에 기여하거나 미주 지역의 민족지도자로 성장했다.

■ 하와이에 독립전쟁을 위한 군사간부 양성기관 ‘대조선국민군단’을 세우다
5천 명이 넘는 한인들이 이주해오면서 이미 작은 한인 사회를 이루고 있었던 하와이.
1914년, 박용만은 이곳에 근대적 군사조직인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했다. 만주지역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창설 첫해부터 하와이 한인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대조선국민군단은 일제의 요주의 감시 대상이었다.
일제 정찰 보고서인 ‘조선인병학교 정황보고서’에 따르면 일제는 국민군단의 상세한 위치는 물론 보유하고 있는 목총의 개수와 장교와 생도의 수까지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박용만은 그가 쓴 『국민개병설』을 통해 모든 국민은 군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자신의 무장독립투쟁론을 더욱 구체화한다.

■ ‘무형한 국가(임시정부)를 설립할 것’을 주장한 박용만
일찌감치 임시정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박용만은 주필로 있던 [신한민보]를 통해 1911년, 조선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무형한 국가를 설립해야된다는 ‘무형국가론’을 주장했다.
이는 상해임시정부보다 8년 6개월이나 앞선 것이다. 박용만은 대한인국민회를 해외 한인의 실질적인 기구로 만들고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결성을 주도했다. 1912년 11월, 국민회는 해외 망명정부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선포했다. 대한인국민회는 ‘무형국가론’에 입각해 국민의무금 제도를 시행한다. 하와이 동포들은 매년 5달러의 의무금을 납부했으며 이 돈은 국내외 독립운동 자금의 원천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독립쟁취의 방법을 두고 ‘외교론’을 강조한 이승만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 박용만, 중국 대륙에 독립기지 건설을 꿈꾸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박용만을 초대 외무총장으로 선임한다. 하지만 외교중심 노선으로는 독립운동에 한계가 있다고 느낀 박용만은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는 대신 이동휘, 문창범 등과 함께 만주와 러시아의 독립군을 조직하는데 박차를 가한다.
박용만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무장독립단체들을 하나로 모으고자 ‘군사통일회의’를 조직한다.
단일체제로 묶어 독립전쟁을 펼친다는 좀 더 효과적인 무장투쟁 전개를 위한 그의 생각이었다.
또한 자금과 무기를 후원받기 위해 중국 군벌과도 연대를 도모한다. 미 정보부대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박용만은 1920년대에 북경을 장악한 군벌 오패부와 합작해 만주지방에 새로운 조선인 독립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원대한 비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 박용만의 죽음, 그는 변절자였나?
1928년, 박용만은 베이징에서 의열단 단원으로 알려진 이해명에 의해 사살됐다. 재판 과정에서 이해명은 자신을 안중근에 비유하며 박용만은 변절자라 거듭 주장한다. 하지만 [신한민보]는 박용만의 죽음을 전하며 그가 혁명사업을 성취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암살당한 ‘드문 애국자’로 평가하고 있다. 박용만, 그는 과연 변절자였을까?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에 보관된 박용만이 죽기 1년 전 작성된 일제 비밀 보고서에 따르면 박용만은 여전히 ‘배일선인의 영수’ 즉, 독립운동의 우두머리로 지칭되고 있었다. 제작진은 최근 중국에서 박용만의 죽기 직전 행적을 알 수 있는 문건을 입수했다. 베이징 당안관에서 발견된 박용만이 죽기 4달 전에 쓰인 문건에는 그가 중국 북방의 군벌세력인 염석산 부대와 결탁해 무장독립전쟁을 위해 한인으로 구성된 학병단을 설치하는 구체적 초안을 그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역사스페셜]은 한 평생 무장투쟁을 위해 몸을 바친 독립운동가 우성(又醒) 박용만을
재조명한다.

신역사스페셜 110회 – 8.15기획 무장투쟁의 길,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 박용만
(2012.8.16.방송) http://histor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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