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부처님은 깨달음을 위한 기만술을 펴야했을까?

Описание к видео 왜 부처님은 깨달음을 위한 기만술을 펴야했을까?

#깨달음 #불교 #차원


우리가 사는 세상을 3차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은 3차원에 꽁꽁 갇혀 있게 됩니다. 만일 4차원과 5차원을 넘나드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세상을 3차원이라고 규정하지 못하겠지요. 결국 우리가 아무리 용을 쓰고 사고를 하여도 3차원의 한계에 걸리고 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3차원을 뛰어넘어 고차원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점에 대해 과거의 수행자들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이릅니다. 그건 바로 고차원을 언어로 담을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언어 자체가 3차원적 도구이므로 4차원 이상을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립문자, 언어도단이란 수행의 지침이 세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고는 오로지 언어에 기초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언어가 없이 무언가를 깨달으라는 얘기는 마치 연료를 버리고 자동차를 운행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언어라는 연료를 태우면 자동차는 3차원 도로에 갇혀 고차원으로 도약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언어라는 연료를 쓰지 않으면 자동차는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 수행자들은 모순된 논리에 갇히고 맙니다.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그건 연료를 쓰지 않고 자동차를 운행하는 방법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산꼭대기까지 운전하고 올라간 뒤에 시동을 끄고 내려오면 됩니다. 다시 말해 연료를 써서 고지대로 오른 뒤에 악셀에서 발을 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생각을 끊는 것이 아니라 심오한 佛法의 진리를 머리로 익힌 뒤에 그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마치 강을 건넌 뒤에 나룻배를 버리고, 달을 본 뒤에 손가락을 잊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깨달음의 과정을 둘로 나누어 앞서 제기한 3차원의 문제를 풀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속제(俗諦)와 진제(眞諦)입니다.


속제(俗諦)는 언어를 기반으로 한 3차원적 접근법입니다. 이에 반해 진제(眞諦)는 3차원의 언어가 끊어진 고차원의 지혜입니다. 진제(眞諦)는 언어가 없기에 억지로 空이라는 단어를 쓰긴 합니다. 그래서 진제(眞諦)의 空에 이르려면 무소유를 실천하고 심지어 붓다나 불법마저도 훌훌 털어버려야 합니다.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해야만 진제(眞諦)의 空에 이르러 깨닫게 된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수행자들은 언어가 지닌 3차원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속제(俗諦)와 진제(眞諦)라는 논리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속제(俗諦)와 진제(眞諦)를 두루 통해야만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해서는 차원의 원리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3차원인가요?



다시 묻겠습니다. 직육면체를 이루는 한 면은 2차원인가요? 아니면 3차원인가요?


그 답은 시야를 좁히면 2차원이고 시야를 넓히면 3차원입니다. 보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차원이란 시야의 크기일 뿐이지 그것이 절대적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야가 3차원으로 굳어진 것뿐이지 원래부터 그런 차원의 구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치 허공에다 선을 그어 차원을 만들어낸 것과 같은 것이지요.



가령 직육면체의 한 면을 2차원으로 규정하고 여기에 [2차원 = 속제(俗諦)], [3차원 = 진제(眞諦)]로 가른다면 어떨까요?


이렇게 구분 짓는다면 영원히 차원의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나뉘어 있지 않은 것을 나누고 그것을 다시 합친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언어의 한계를 이유로 들어 속제(俗諦)와 진제(眞諦)로 나누는 것 또한 같습니다.



언어는 작게 보면 3차원이지만 큰 틀에서는 고차원의 모든 것에 속해 있습니다. 그렇기에 언어엔 한계가 있으면서도 없고 지혜는 무궁합니다. 다시 말해 수행자들이 말하는 속제(俗諦)와 진제(眞諦)의 구별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요컨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손가락을 통해 달을 보는 구조라면 우리는 영원히 깨달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차원의 원리에 의해 나룻배와 손가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차원의 경계가 무너지면 나룻배와 손가락 자체가 피안과 달이 됩니다. 애초부터 속제(俗諦)와 진제(眞諦)의 구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물론 속제(俗諦)와 진제(眞諦)를 수행의 기초 방편으로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을 마치 나침반처럼 불변의 지침으로 여긴다면 또 하나의 족쇄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피안으로 가기 위한 나룻배가 필요하신가요?



행여 달을 보고 손가락을 잊으려고 하시나요?



왜,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불법을 찾지 못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혹시 수행자들이 만들어 놓은 이분법적 논리에 깜빡 속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Комментарии

Информация по комментариям в разработк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