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정조"가 사랑하고 아끼던 딸이자, "순조"가 애지중지하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Описание к видео 조선시대 "정조"가 사랑하고 아끼던 딸이자, "순조"가 애지중지하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숙선옹주(1793년~1836년)는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의 딸로 본관은 전주이고, 거주지는 서울입니다.
​어머니는 좌찬성 박준원의 딸인 수빈박씨로 친 오라버니는 조선의 제23대의 왕인 순조입니다.
​1793년(정조 17년) 3월 1일에 숙선옹주는 정조와 수빈박씨의 1남 1녀 가운데 1녀로 태어났습니다.
​숙선옹주가 4살 되던 해에(1796년) 천연두에 걸리자 아버지 정조와 오빠인 순조는 창덕궁 이문원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후에 숙선옹주가 완쾌를 하자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딸의 완쾌를 기뻐하는 시를 지었습니다.
​숙선옹주는 아버지 정조의 생전에 작호를 받지 못하고 오빠인 순조가 즉위한 후에야 '숙선'이라는 작호를 받습니다.
숙선옹주가 정조 생전에 작호를 받지 못한 이유는 오빠인 순조가 아직 세자 책봉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찍이 대신들은 순조를 ​세자로 책봉할 것을 몇 차례 건의하였으나, 정조는 자신이 세손으로 책봉된 나이가 될 때를 기다려 아들 순조를 세자로 책봉하고자 했습니다.
​이로 인해 순조는 정조의 뜻에 따라 유교적 소양을 쌓으면서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할 수 있었고 11살이 되던 정조 24년(1800년​) 정월에 왕세자로 책봉이 됩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순조는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준비된 왕세자로서 ​11살의 나이는 적당했지만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나이었습니다.​
​결국 숙선옹주는 아버지 정조가 승하하고 삼년상을 다 마친 10살이 되어서야 오라버니에 의해 작호를 받게 됩니다.
​물론 아명 정도는 있었겠지만 공주, 옹주의 작호에 좋은 뜻을 담아 정성스레 지어주던 다른 왕들의 관습을 생각하면 분명히 안쓰러운 일이었습니다.
​순조는 왕으로서 나이가 어렸기에 즉위와 함께 ​왕의 법적 증조모이자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3년간 수렴청정을 합니다.
​아들인 순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도 어머니 수빈박씨는 변함없이 시할머니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 왕대비 효의왕후에게 하루 3차례 문안을 할 정도로 정성을 보입니다.
​그녀는 아랫사람을 인자하면서도 위엄 있게 이끌었고, 진귀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평상시에 말수가 적었다고 전해집니다.
​왕실의 어른들도 이러한 수빈박씨를 아꼈습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수렴청정 당시에 그녀의 아버지 박준원을 어영대장을 거쳐 판의금부사로 기용했으며, 수빈에게는 특별히 동궁에게만 쓸 수 있는는 '저하'의 칭호를 쓸 수 있게 합니다.
​또한 숙선옹주를 일반 후궁의 딸로 볼 수 없다며 공​주와 옹주 사이의 명칭을 주자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수빈박씨가 극구 사양하고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무산이 됩니다.
​만약 이것이 수락되었으면 숙선옹주는 옹주 아닌 숙선궁주나 군주 혹은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뻔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10살이 되던 1802년(순조 2년)에 숙선옹주로 작호가 정해집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03년(순조 3년) 순조는 옹주의 가례를 행하기 위해 ​부마 간택을 진행합니다.
​숙선옹주의 혼례를 위한 금혼령이 내려지고 이듬해 희정당에서 옹주의 부마 후보들 중 초간택이 이루어집니다.
​같은 해 중희당에서 재간택을 하면서 전 정랑 홍인모의 아들이자 홍석주의 동생인 ​홍현주가 부마로 뽑힙니다.
​순조는 곧바로 홍현주를 영명위에 봉하였고,​ 가례청의 설치를 명합니다.
​그가 부마로 간택된 이유는 홍현주의 조부인 홍낙성이 혜경궁 홍씨의 6촌 오빠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순조는 하나뿐인 친동생의 가례일이 정해지자 특별히 홍현주의 집으로 쌀 1백 석, 무명 10동, 포 5동, 돈 3천 냥을 보내 혼례비용에 보탬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1804년(순조 4년) 5월 27일 숙선옹주는 12세의 나이에 ​홍현주와 혼인을 합니다.
​순조와 숙선옹주는 우애가 각별히 돈독하였는데, 옹주가 혼인할 때 순조는 직접 여훈과 여계를 지어 하사했습니다.
​또한 숙선옹주가 출합(왕자녀가 혼인하여 궐 밖에 사가를 짓고 사는 것) 한 뒤에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뿐인 누이라 이해해 달라면서 옹주의 집에 직접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순조대왕묘지문, 명경왕비(효의왕후)가 내린 행록등의 기록을 살펴보면 순조는 숙선옹주를 자신과 같이 대했으며 그녀가 결혼한 지 고작 3일 만에 동생을 그리워하여 매우 서글픈 빛을 띠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옹주가 순조를 방문하러 입궁한다고 하면 기뻐하며 동생의 방문을 몹시 기다렸는데 기쁜 표정이 주변 사람들에게 보일 정도로 눈에 띄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오라버니인 순조가 1834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고 2년 후인 헌종 2년(1836년​)에 동생인 ​숙선옹주마저 44세의 나이로 삶을 마치게 됩니다.
​이에 당시 대왕대비이자 순조의 왕비였던 순원왕후는 부의와 장례의 절차를 전례대로 거행하고 성복일에는 내시를 보내어 슬픔을 표하도록 합니다. #역사 #조선시대 #공주 #조선왕조실록 #조선

Комментарии

Информация по комментариям в разработк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