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과 15과 능동적 안식과 영원한 교제의 기름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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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능동적 쉼(메누하)의 기름부음(22일)

하나님은 6일간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그치시고 쉬셨다. 복 주시기 위하여 거룩한 교제를 위하여 영원한 쉼을 위하여 제 7일을 성별하셨다.

유대 민족은 안식일을 열심히 지킨다. 하지만 안식일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쉬는 날이다. 그리고 특별히 그날에만 쉬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 안에 서 쉬는 것이 쉼의 영성이다.

대개 우리는 일하기 위하여 휴가를 간다. 그러나 안식일을 제정하신 주님은 우리가 쉬기 일하여 일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마지막 목적은 안식, 곧 주님 안에서 영원히 쉬는 것이다. 그러한 쉼을 향하여 우리가 지금 일하고 있다. 이것이 세상 휴식의 개념과 다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안식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안식을 누리려면 안식의 주인인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 강, 산을 바라보면서 메누하를 체험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메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 밖에 있는 자들은 메누하가 없다. 복잡하고 추하고 낮은 그러한 삶의 장터에서도 주님과 함께하면 그곳이 메누하, 쉴 만한 물가이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메누하를 위하여 일하다가 메누하를 잃어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진정한 메누하 사역은 삶에 지친 영혼들을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도록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고요한 경치 이것이 메누하(쉼)는 아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메누하를 체험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일하면서도 쉬고, 쉬면서도 쉰다.

이것이 주님 안에서 찾아지는 능동적 안식, 메누하이고 쉼의 영성이다. 쉬는 것도 능력이다. 아이큐가 높은 것 같이, 쉬는 지수, 메누하 지수 RQ, 곧 resting(혹은 Relaxing Quotient)지수가 높은 것도 능력이고 영성이다. 아 무나 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별한 영성과 능력이 있어야 쉴 수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좋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움직여야 했고 많은 것을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처럼 생각했었다. 한국에서 유명한 교회에 다니던 한 집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셨다. 그분은 몇 주 다니다가 다른 교회로 가셨다. 다른 교회로 간 이유인즉슨 교회가 너무 활동이 없고 지루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는 뺑뺑이 돌리기로 유명한 교회였는 데 한시도 쉬지 않고 교회가 활동하고 있고 24시간 교회가 열려있어 지루한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미국교회는 집회가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스스로 남은 시간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해했는데, 결국 그것을 만족시켜주는 다른 교회로 갔다.

이러한 증상은 목회자들에게도 나타나기도 한다. 심방 가고 기도원 가고 세미나에 참석하고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바빠야 무엇인가를 한 것처럼 생각하는 목회자나 사모들도 주위에서 많이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교회가 뱅글뱅글 돌려주어야 생활이 가능한 교인들, 혼자 있을 때는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교인들은 참 불쌍한 교인들이다. 사실, 교회 생활은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가정과 사회에서 실제가 되어야 하며, 혼자 있는 시간에도 스스로 시간을 청지기 하며 자신에게 유익한 일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시대가 변하여 쉬는 생활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런데도 쉼의 영성이 그렇게 높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일을 중심으로 사는 신앙생활은 이러한 부조화를 낳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쉬므로 초청하셨고 그 쉼 가운데 우리를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가신다. 그러므로 쉬는 능력은 완전히 일로부터 쉬는 능력이 아니라, 일하는 가운데에서도 쉴 수 있는 능력이다.

능동적 안식, 능동적 쉼을 누리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요사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쉬는 능력의 중요성이다. 쉬는 시간에 불안해하지 않고 마음껏 누리며 쉬는 능력이다. 쉬면서 “이 일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쉬면 집사님들이 뭐라고 말하지 않을까? 기도해야 하는데. 찾아봐야 하는데” 하면서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쉬는 것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쉼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온전하고도 즐거운 쉼을 누릴 수가 있다. 이러한 쉼이 우리에게 누려지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은 사실, 우리에게 무익한 것인지도 모른다. 주님을 우리의 짐을 덜어주시고 쉬도록 초청해주셨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쉼!! 쉼의 영성, 메누하 지수가 우리에게 점점 높아지고 깊어지기를 소원하게 된다. 리처드 포스터는 “바쁜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바쁜 것은 사단 자체라고” 말했다. 사단은 “좀 더 일해, 좀 더 일해”라고 종의 영성이 강해지도록 부축인다.

또한 사단은 “죽도록 충성하라”라는 말을 잘못 해석하여 죽을 정도로 일하라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이 말은 “죽음의 문턱까지도, 죽음의 순간까지도” 하나님께 충성하라는 말씀이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주님께 충성하라는 말과 죽을 정도로 일하라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사단도 성경을 인용하여 성도들을 현혹시킨다. “죽도록 일해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지 않는다.” 그러면서 사단은 쉼을 빼앗아 간다. 쉼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진정한 주님과의 만남이 없어진다. 조용하게 쉬면서 주님과 만날 시간을 도적질해 간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죽을 정도로, 주님과 교제하지도 않으면서 일에 중독되는 것이 정말 헌신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Be faithful until death, and I will give you the crown of life"(계 2:10)

메누하(쉼, 안식)는 은혜이고 선물이다. 그러나 사단은 일에 중독되도록 하여 노예로 만든다. 그것은 종의 영성이다. 하지만 메누하는 자녀의 영성이다. 자녀들은 죽을 정도로 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일로 인하여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녀는 사랑의 관계일 뿐, 일을 잘 못 한다고 하여 그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종들은 조금만 일을 게을리하여도 주인이 자신을 내어 쫓을 것을 걱정한다. 그래서 마음의 평강이 없다. 언제나 불안하고 언제나 쉼이 없다. 만일 우리가 쉼이 없다고 한다면 아직도 종의 영 성을 누리고 있는 것일 것이다. 샬롬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 사단이 하고 있는 가장 큰 훼방이다.

질문: 여러분은 능동적 안식을 갖고 계신지요?

15. 영원한 교제의 기름 부음(23일)

하나님은 6일간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그치시고 쉬셨다. 그래서 유대 민족은 안식일을 열심히 지킨다. 그런데 위험할 때마다 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민족을 지켜주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주님과 만나서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주님과 대면하면서 6일 동안 공간(세상)의 가치와 부딪쳐 사는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을 지켜라(탐내라).”라고 말씀하셨다. 지키라의 원어는 탐내라는 말의 근원과 같다. 그래서 이웃의 물건(공간, 소유)을 탐내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주님과의 대면)을 탐내라고 명령하셨고, 그러면 주님 안에서 십계명을 지키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안식일은 사실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시간의 지성소를 만나게 된 후에 더 발전되었다. 공간의 교회는 사라졌지만, 시간 가운데 주님이 그들을 만나러 오셨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에게는 시간이 없다. 그 분에게는 영원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영원이 순간 안으로 들어오는 시간이 안식일의 장엄한 진실이다. 그때 순간이 영원을 만나는 것이다.

이 영원한 지금(eternal now)은 영원한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시간이다. 우리가 이 영원한 지금에 들어가면 시간이 없으신 영원한 주님과 대면하게 된다. 그날 거룩의 기름 부음이 부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성별된 시간 안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주님의 영광과 만나는 시간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주님과 대면했느냐가 중요하다. 이 안식일에 들어가는 것은 그러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훈련의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안식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주님과 대면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올려드리면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 힐링룸에서 처럼, 누워서 체험하는 것만은 아니다. 말씀과 기도, 성만찬, 찬양 등을 통해 주님과 만난다. 이 대면의 기름 부음, 임재의 기름 부음 이 안식일이라는 특별한 구별한 날을 통하여 임하는 것이다.

이날 주님과 대면하면서 얻은 힘으로 세속적인 사회를 살아갈 능력을 얻는 것이다. 거짓말하지 않고 진실하게 도둑질하지 않고 정당하게 공의롭게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것이다. 우상을 섬기지 않고 주님만을 섬기는 힘을 얻는 것이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1:9)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서 사귐을 위해서 부르셨다. 우리는 흔히 직분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생각하고 내가 목사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장로가 되어야 할까? 고민하지만 사실 주님은 우리를 친교하기 위하여 사귀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

창조를 하는 데는 6일을 투자하셨지만 사귀기 위해서는 영원을 투자하셨다. 복 받은 그 시간을 표현하는 몇 가지 단어가 있다. 대면, 쉼, 거룩, 영원한 사귐 등이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 사람 다음에 시간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소, 즉 장소를 구별하셨다. 안식일은 시간으로 집을 건축하는 날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든 일들을 다 마친 후에 서로 대면하면서 사귀고 교제하시자고 제안하신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날이고 우리가 탐내야 하는 날이다. 그리고 이렇게 제7일에 주님과 만나는 훈련이 매일 일상화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하루만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만 안식일이 아니라 매 순간 주님과 대면하는 훈련, 교제하는 훈련이 안식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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