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사순 제 2주간 수요일 / 2026년 3월 4일
김유정 유스티노 신부
[원고 보기]
예레 18,18-20 ;마태 20,17-28
찬미 예수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예언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습니다. 예레미야를 박해한 사람들은 사제, 현인, 예언자들인데요, 그들은 예레미야가 없어져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예레미야가 이 세 집단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사제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하며(2,8) 자신의 소명에 합당하지 않다(5,31; 6,13)고 비판했습니다.
한편, ‘현인’으로 번역된 ‘하캄’이라는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주로 왕의 고문이었으며 국가 정무에 관여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지혜가 없는 현인들을 고발하며, 그들은 자질이 결여된 예언자와 사제들과 함께 멸망할 것이라 말했습니다.(8,8-12)
또한 예언자들에 대해서는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2,8) 거짓말을 하며(14,13-15; 23,14) 불경한 자들이라고 비판했습니다(23,11). (Lundbom, 1:826-827)
그러자 이 세 집단은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 버리자.”고 작당하며, 예레미야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여 음모를 꾸민 이들도 마찬가지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수난에 대해 세 번째로 예고하십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는 예루살렘 여정이 시작되기 전에 하셨고, 두 번째 예고는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시작하신 후 갈릴래아에 계실 때 하셨지만, 오늘 마지막 예고는 예루살렘 가까이에서 하신 것으로 상황은 더욱 위험해졌습니다.
세 번째 예고에서는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진다’는 말씀을 통해 유다의 메시아가 이방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배신과 굴욕에 대한 새로운 암시가 제시됩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이란 로마 제국을 뜻하는데, ‘그들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구체적 처형 방법까지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엄중한 상황에 야고보와 요한과 그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다가와 청합니다. 하늘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위에 관심을 갖는 것은 기본적인 본능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속한 사람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야고보와 요한은 지난 주일 복음에서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한 제자들입니다. 그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청을, 그것도 마지막 수난 예고 직후에 한다는 것이 충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야고보 사도는 후에 열두 사도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하시게 됩니다. (사도 12장)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4절, 11절)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 53장을 인용하여 말씀하시는데요, 이사야서 53장에는 백성들을 위해 고난 받는 야훼의 종에 대한 네 번째 노래가 나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이사야서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라고 표현한 것은 한 사람의 죽음과 많은 이의 유익을 대조하여 말한 것입니다. (R.T. France, 763) 예수님께서 “모든 이의 몸값”이 아니라, “많은 이의 몸값”이라고 하신 말씀도 이사야서와 같은 맥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미사 중 성혈을 축성할 때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여기서 ‘많은 이’는 한 사람과 많은 사람을 대조하는 표현이고, 내용적으로는 ‘모든 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이를 위해 피를 흘리셨는데 오늘날 이스라엘과 미국, 이란 사이의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있습니다. 폭격으로 이란의 한 초등학교에서 165명의 어린이와 교사들이 숨졌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실 하느님께 우리 아픈 마음을 합하여 봉헌합니다.
사순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죄로부터의 회개를 묵상하지만, 오늘 말씀에서는 특별히 두 가지를 더 묵상해야겠습니다.
첫째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에서의 예수님의 수난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말씀입니다. 성목요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을 재현하게 될 것입니다. 성목요일뿐만 아니라 사순시기 동안,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써 주님을 본받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우리는 더 낮은 사람이 더 높은 사람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 말씀은 명확합니다. 더 사랑이 많은 사람이 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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