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니고데모와 고양이
요한복음 3장을 보면,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과 예수님과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새로운 의미를 하나씩 발견하게 되는 기쁨을 갖게 됩니다. 성경과 다른 문헌에 나타난 것들을 종합해 보면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은 당시 유대교 내에서도 요란스럽게 엄격하기로 이름난 바리새파에 속하는 종교적인 지도자로 산헤드린이라는 의회의 의원이어서,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영향력과 재력을 겸비했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간 예수께서 행하시는 이적과 가르침을 소문으로만 듣던 중, 하루는 자기가 직접 예수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그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낮이 아닌 어두운 밤을 기다려 예수를 찾았습니다. 그가 밤을 택하여 예수를 만나게 된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선은 자기의 사회적 신분 때문에 될 수 있다면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낮 시간 보다는 밤을 택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빴던 예수 일행의 일정을 생각한다면, 낮 시간 보다는 저녁 시간이 그래도 좀 더 한가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밤을 택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려면 아무래도 저녁 시간이 낮 시간 보다는 여유로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와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기성 종교인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를 시험하거나 그에게서 약점을 찾기 위하여 예수를 찾아온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인생의 절실한 문제에 대하여 예수로부터 무엇인가 새롭고 진지한 의견을 듣고 싶었던지, 아니면 알맹이는 없이 껍데기 형식만 남은 유대교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좋은 고견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안을까 하는 생각에서 예수를 찾았 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가졌던 예수와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 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생님과) 같이하지 않으신다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이적을 행할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한 마디로 초면의 인사이자 상대로부터 호감을 얻고 적어도 당신에게 해를 주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은 아니라는 외교적인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사가 끝나고 대화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밑도 끝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당신에게 말하지만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진정으로 라고 하는 말을 두 번 박복하신 것으로 되어 이는데, 이것은, ‘아멘 아멘’ 을 그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초면에 인사를 드린 것뿐인데 예수께 이렇게 성급한 반응을 보이신 것을 보면 그는 니고데모의 속 생각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읽으셨던 니고데모의 속마음은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궁금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의 눈에 비친 니고데모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철저히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께서 처음 니고데모를 만났을 때 그를 가엽게 여기셨던 이유였습니다. 그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기에 아무리 학식이 풍부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그의 사고와 이해력은 한계성을 가지고 있어서 세상 생각 밖에는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전한 메시지는 간단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하늘 나라나 영생에 대하여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에 장성한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의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느냐는 바보스러운 반문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거듭 난다고 할 때 ‘거듭’ 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Anothen이라는 부사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를 again ‘다시’ 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우리말 성경에도 ‘거듭’이나 '다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Anothen 이라는 고대 희랍어는 ‘다시’라는 뜻이 있는가 하면, ‘위로부터’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다의적인 어휘입니다. 그러니 본문은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또는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없다고도 해석이 가능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철저히 세상에 속한 사람 답게 이 두 가지의 의미 중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데 정신을 쏟았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은 니고데모가 예수에게 던졌던 이 뚱딴지 같은 반문 때문에 니고데모를 센스도 없는 멍청한 사람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세상의 안목에서 본다면 니고데모의 반문은 아주 이치에 맞는 것이었고, 그는 결코 바보스러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실상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지만, 니고데모가 예수를 안타깝게 만들었던 것은 그가 하늘을 모르는 철저히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니고데모는 예수를 실제로 만나서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예수를 그저 한 사람의 훌륭한 랍비로 밖에는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결코 찾는 것을 발견하게 마련인 것 같습니다.
나는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프시캩이라는 영국 어린이들의 동요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어린이 들의 동요는 이렇게 이어져 나갑니다.
Pussy cat, pussy cat, 어디 갔다 왔니?
여왕님을 보려고 런던 같다 왔다.
Pussy cat, pussy cat 무엇보고 왔니?
여왕 의자 밑에 있는 새앙 쥐를 보았다.
고양이가 고양이인 이상, 고양이 눈에 맨 먼저 들어온 것은 새양 쥐였습니다.
고양이는 여왕을 보기 위하여 런던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실제로
왕관을 쓰고 옥좌에 앉아 있는 여왕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고양이에게 여왕은 의자에 앉아 있는 평범한 여인일 뿐이었고, 고양이가 가졌던 흥미의 촛점은 역시 그녀의 의자 밑에 있는 새앙쥐였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훌륭한 랍비를 만나서 무엇인가 새롭고 멋있는 진리의 말씀을 들어 볼 양으로 예수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던 평화의 왕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찾고 있던 새앙 쥐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이 니고데모의 이야기와 Pussy cat 이야기를 번갈아 생각하면서 오늘의 우리 교회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해방 후 한국교회의 성장은 다른 나라들 간에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얼마나 정확한 통계인지는 몰라도 한국 사람들은 열 사람 중의 둘이 기독교인이라면서 대견스럽게 자랑을 늘어놓던 한국교회의 지도자들도 만나 보았습니다. 내가 철부지 같은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도, 교인의 수가 그렇게 자랑스러운 것입니까?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좀 심하게 이야기를 하면 세례를 받았다고 다 교인입니까? 교회에서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다고 다 하늘나라에 시민입니까? 목사 되는 안수식이 어디 천국 시민권 수여식이랍니까?
교회란 심심해서 다니는 곳도 아니고 친구를 마나러 가는 곳도 아니며 들어서 해로울 것 없는 목사님 설교 듣고 수양이나 하기 위하여 가는 곳도 아닙니다. 그리고 더구나, 이민교회의 경우라면, 일 주일 내내 영어 때문에 주뉵이 들어서 움추렸던 가슴을 활짝 펴고 한국말을 마음껏 지껄여 스트레스를 풀기 위하여 가는 곳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교회가 값싼 동정심을 발휘하는 자선단체도 아니구요. 교인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를 만나려고 교회엘 가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에 가서 예수를 만나지 못한다면 런던 다녀온 프시캩이나 무엇이 얼마나 다릅니까? 새앙 쥐는 왕궁 보다는 시골에 더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를 만나기는 만난다 하더라도, 그에게서 위로부터 거듭나는 변화를 받지 못한다면, 니고테모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교회란 예수를 만나려고 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3장에 기록된 것을 보면 예수께서는 사람이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첫 단계의 필수 조건이지 충분조건까지는 못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미 열심히 예수 믿는 분들에게 낙담을 드리기 위하여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하나님은 찾는 것을 주시는 분이며, 갈망하는 사람을 만나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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