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률철학티비 제127강 과거 시험에 세번 낙방한 조선의 석학 퇴계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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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철학 티비 제127강 과거시험에 세 번이나 낙방한 조선의 석학-퇴계 이황
조선, 아니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대학자가 과거 시험에서 세 번이나 낙방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퇴계 이황은 실제로 스물 네 살 때 과거시험에 응시했는데, 세 차례 연거푸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3년 후에는 진사시에 수석으로, 생원시에 차석으로 합격했고 결국 문과 회시(33명을 선발하는 최종 시험)에까지 급제했지만요.
성균관 대사성과 대제학을 역임한 이황은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와 재혼한 춘천 박씨 입장에서 보자면, 다섯 아들 가운데 막내인 셈인데요. 생모 박씨의 엄격한 훈도와 타고난 재능, 근면 성실한 자세로 이황은 일찍부터 학문적 소양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먹고 자는 일까지 잊어가며 학문에만 매진한 결과 소화 불량증에 걸렸고, 이때부터 고기만 먹으면 체하는 버릇이 생겨 언제나 야채를 즐겼다고 합니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이황은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스스로 물러나는 일이 많았는데요. 학문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성향도 있었지만, 당시 ‘사화’라고 하는 유혈사태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여러 번 권유에도 이황이 출사를 거부하자 명종 임금은 몰래 화공을 (이황이 머무는)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려오게 한 다음, 그것을 병풍으로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며 이황을 흠모했다고 합니다.
70세를 바라보던 이황이 선조의 권유를 뿌리치고 귀향을 위해 뚝섬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수백 명의 후배와 제자들이 나와 눈물로 이별했다고 하는데요.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든 선비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이황과 기대승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사단칠정 논쟁’이 유명한데요. 대사성(정3품)까지 지낸 59세의 노대가(이황)는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33세 소장(기대승)의 이론을 신중히 검토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할 때마다 고쳐 나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밖에 본 영상에는 왜나라(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절단 가운데 황윤길의 보고와 김성일의 보고가 서로 달랐으며, 결국 2년 후 (황윤길의 염려대로)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이 일어났다는 사실, 생원과 진사의 특권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황이 칼에 손을 베인 형을 보고 통곡했던 까닭이 무엇인지 등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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