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을 준비하는 북한산성. 1부 왜 축조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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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4 북한산초등학교에서 북한산성으로 이동합니다.
00:00:09 북한산성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삼국의 격전장으로, 고려의 대몽항쟁의 증거로, 조선의 수도방어 기지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명승지로 우리의 수도 서울을 지키고 있었지요.
00:00:24 하지만 오랜시간동안 아름다운 삼각산의 경치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국립공원이라고 기네스북에 오르고, 전세계에서 수도와 가장 가까운 국립공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곳의 300년이 넘은 산성은 얼마전까지 그 존재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던 것이 현실입니다.
00:00:44 그런 북한산성이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한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한양도성, 탕춘대성과 함께 추진하고 있는데요.
00:00:54 이번 영상에서는 북한산성을 함께 돌아보시면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만한 가치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00:01:04 본영상은 2024년에 촬영한 북한산성의 영상과 함께 2013년에 출간된 제 저서인 '기네스북 북한산에서 세계유산 조선왕릉까지'의 내용을 재정리해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답사에 최중화 선생이 함께 했습니다.
00:01:09 북한산성의 개요
00:01:10 북한산성은 국가유산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711년에 숙종의 명에 의해 축조된 현재의 산성은 고양시와 서울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00:01:25 총 둘레는 12.7㎞이며, 체성을 쌓지 않은 지역을 제외하면 8.4㎞입니다. 성곽의 면적은 약 6.2㎢입니다. 북한산성의 동북쪽에 자리잡은 삼각산은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총면적은 274,143㎡ 입니다.
00:01:45 북한산에는 백제시대부터 산성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요. 백제 개로왕 5년(132)에 세워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북방을 지키기 위해 북한산에 북한산성을 축성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북한산을 가리키는 곳은 한수 이북 즉, 한강의 북쪽에 있는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광진구에 있는 아차산성에서 '북한산성'이라고 명문이 있는 기와가 확인되었거든요.
00:02:15 고려 고종 19년(1232)에 북한산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최영장군의 명령으로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고 하는데, 중흥산성이라 불리기도 하는 고려시대의 ‘북한산성’ 은 조선시대에 쌓여진 북한산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발굴조사 결과 확인되었습니다.
00:02:35 즉, 현재의 북한산성은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숙종 37년(1711)에 왕명으로 축성한 성입니다.
00:02:45 (아, 이곳은 북한산성의 하창지입니다. 하창지는 아랫쪽에 있는 창고터라는 뜻입니다. 북한산성의 창고가 있었던 곳인데, 2000년대 초까지 음식점들이 많아서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은 정화사업으로 상인들이 모두 산성 밖으로 이주하고 지금과 같은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00:03:10 북한산성에서 본 조선의 관방체계
00:03:13 먼저 테뫼식산성과 포곡식산성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산성을 구분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지만, 성곽과 봉우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테뫼식 산성과 포곡식산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00:03:28 테뫼식은 산정식이라고도 하는데요. 산성이 산꼭대기를 둘러싸고 있는 형태입니다. 가까운데서 예를 찾아보면 행주산성이 있습니다.
00:03:38 포곡식은 산성이 골짜기를 둘러싸고 있는 형태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어져있는 여러 산들을 한꺼번에 둘러싼 형태이지요. 북한산성은 포곡식산성입니다.
00:03:53 그렇다면 테뫼식과 포곡식의 차이는 뭘까요? 포곡식은 산꼭대기 하나만 사수하는 테뫼식에 비해 규모가 월등히 크고, 만들기도 어렵습니다. 규모가 크니 사람들도 훨씬 많이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00:04:08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수도인 서울(당시의 한양, 한성)은 인근에 주민들을 대피시킬 만한 대규모 성곽이 없었습니다. 대피성이 없는 상황에서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일본군과 격전을 치른 곳 중의 하나가 행주산성입니다.
00:04:28 겨우 3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가지고 있는 작은 테뫼식산성이지요. 결국 일본군을 조선땅에서 내보냈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왕조는 수도 한양을 지킬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야 했지요.
00:04:43 이후 1624년에 남한산성이 축조되었습니다. 하지만 한양도성과 이어져 있지 않았고, 주변으로 더 높은 봉우리가 있다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청나라에서 가지고 있던 홍이포로 산봉우리에서 공격하면 대안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병자호란(1636년) 때, 남한산성에 있었던 인조는 청나라 장수 앞에서 땅바닥으로 박치기를 하면서 비굴하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00:05:08 결국 후대의 왕들은 한성에 사는 주민들을 대부분 수용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성곽을 인근에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효종 때 시작되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실현되지 못하다가 왕권이 강력해진 숙종대에 현실화되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북한산성입니다.
00:05:28 북한산성은 한양도성과 탕춘대성으로 이어져 있는 성으로 한양도성보다 작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을 수용할 수 있을 만한 크기로 축성되었습니다. 유사시에 방어력이 떨어지는 평지성인 한양도성을 떠나 쉽게 넘보지 못하는 북한산성으로 수도를 옮겨 항전하자는 계획을 세운 겁니다.
00:05:45 이렇게 평지성과 산성이 이어져 있는 것을 이성체계라고 합니다. 물론 이성체계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고대시대부터 평지에 수도를 정한 많은 국가는 이성체계를 채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숙종은 수도인 한성의 이성체계를 위해서만 북한산성을 축조한 것일까요?
00:06:04 숙종이 북한산성을 축조한 또 다른 이유는?
00:06:07 (북한산성 이주사업에 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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