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격의 달인 장효조 선수

Описание к видео 타격의 달인 장효조 선수

0점대 평균자책점의 선동열,
22연승의 박철순,
44번 출전에 30번의 승리 장명부
한국 프로 야구에는 도저히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록의 영웅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통산타율 .3할3푼1리, 4번의 타격왕, 6번의 출루율 1위…
이 중 한 가지도 획득하기 어려운데,
이 세 기록을 모두 다 가진 영웅이 존재합니다.

야구의 추억 한국 프로야구의 영웅들
이번 편의 주인공 바로, 타격의 달인 장효조 선수*입니다.
1956년 7월 6일 - 2011년 9월 7일

1973년 9월 14일, 황금사자기 결승전, 대구상고 대 배명고
요즘 어지간한 프로야구 주말경기보다 훨씬 더 붐볐던
2만 5천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구상고가 6회에 먼저 3점을 내고도 8회 3점을 허용해
경기는 연장으로 돌입합니다.

김한근·석주옥·박기수라는
정상급 투수 세 명으로 구축된 두터운 투수진을 앞세워
그 해 이미 대통령배와 봉황대기를 차지한 대구상고는
‘3관왕’이라는 목표를 눈앞에 두고 커다란 암초를 만난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연장 10회초, 1사 2루.
3번 타자 이승후의 깨끗한 타구가 중견수 앞으로 굴러갔고
순간 2루 주자는 날쌔게 3루를 돌아 홈으로 파고들어 갑니다.
그러나 깊지 않은 안타였기에 중견수는 곧바로 공을 잡아 던질 수 있었고,
송구되는 공과 달려드는 주자는 거의 동시에 홈에서 만납니다.
양쪽 모두 우승을 위해 한 발도 양보할 수 없는 날카로운 순간,
엄청난 흙먼지가 일어나며 승부의 순간을 가렸고
관중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잠시 후 흙먼지가 가라앉는 순간
적막을 가르는 심판의 ‘세이프’ 함성
홈플레이트 위에는
왼손과 오른쪽 뺨을 포개놓은 채 의식을 잃은 결승주자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대구상고는 황금사자기마저 가져가며
‘역대 최강 고교팀’의 요건인 ‘메이저대회 3관왕’을 달성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승점을 올리고 곧장 응급실로 실려갔던
그 소년은, 그해 세 번의 대회에서
5할 가까운 타율(40타수 19안타)로 두 번의 타격왕과
한 번의 타격 3위를 마크하며 팀 공격력을 주도한 2학년생 장효조였습니다.

그의 전설은 대학 입학 후에도 계속 작성되어 갑니다.
장효조는 입학 직후 참가한 대학야구 춘계연맹전에서
당장 4할대 타율로 타격 랭킹 2위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2학년 때는 .4할5푼9리(159타수 73안타),
3학년 때는 .4할3푼7리(112타수 49안타)의 기록을 이어나가며
이름 앞에 ‘안타제조기’라는 별명을 붙이게 됩니다.

또한, 1975년부터 1978년 사이,
대학 무대의 장단기리그에서 타격상은 거의 대부분 장효조의 몫이었고,
그는 거기에 곁들여 때로는 도루상, 때로는 홈런상을 부산물로 챙겨가기도 했습니다.
이제
장효조는 그저 ‘두려운 타자’가 아니라
‘그러려니 생각하고 넘겨야 하는 타자’를 상징하게 됩니다.

1975년부터 본격적으로 국제대회에 국가대표팀을 파견하기 시작했던 한국은
1976년부터 대학 2학년생인 장효조를 붙박이로 차출하기 시작합니다.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월드컵 우승을 비롯해
1978년과 1979년 세계선수권 준우승 등 세계대회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는 과정에 장효조라는 이름이 새겨집니다.
그는 1982년 한국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내내 4번 타자를 맡으며
감동적인 우승을 일궈내는 주역이기도 했습니다.

1983년은 한국 프로야구에 있어서 또 한 번의 출발점입니다.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를 위해 프로 진출을 보류했던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프로 무대에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포철과 군인팀 상무에 소속되어 있던
장효조도 1983년에 프로 무대를 밟게 됩니다.
하지만 그때 나이가 이미 우리나이로 스물여덟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신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신인이 됩니다.
첫해, 곧바로 117개의 안타를 치면서
.3할6푼9리의 타율과 .4할7푼5리의 출루율, .6할1푼8리의 장타율을 기록해
타격 네 가지 부문에서 모두 1위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홈런도 리그 3위인 18개를 때려내기도 했습니다.
곧장 원년의 백인천을 대신해 강타자의 상징으로 떠오른 게,
바로 장효조 선수였습니다.

경악스런 데뷔 시즌 뒤로도 장효조는
서른넷이 되던 1989년까지
모두 일곱 시즌 내내 3할대 밑으로 내려오지 않는 타율을 유지하며
세 번의 타격왕과 다섯 번의 출루율왕을 더합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슬럼프도 없었고, 자잘한 부상이나 마음고생도 별것 아니었습니다.

딱 한 번,
트레이드를 당한다는 것이 마치 호적에서 파내지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던 시절
고향 팀 라이온즈에서 롯데 자이언츠로 보내진 뒤였던
1989년과 1990년에 각각 .3할0푼3리과 .2할7푼5리로
‘충격적인 부진’을 겪은 적이 있지만 곧 털고 일어나
1991년 다시 .3할4푼7리의 고타율로 치열한 타격왕 경쟁에 나서며 재기하게됩니다.

장효조는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는 힘과 스피드, 거기에 정확성, 그리고 수비력에 더해
센스와 근성까지 모든 것을 갖춘 선수였고,
밀어쳐서도 홈런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도
배트를 짧게 잡으면서 더 많은 안타를 만들어냈듯,
그저 필요에 따라 한 쪽을 희생해 다른 한쪽을 보충하는 ‘안배’만으로
어느 부문이든 최고가 될 수 있는 선수였습니다.

그저 들여다볼수록 놀랍고 대단하고 굉장한 이력.
천재이며, 황태자이며, 최고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기록들.
그러나 장효조는 역설적이게도 지지리도 ‘상’복이 없는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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