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둘레길 8구간 9구간 10구간 (목요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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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둘레길 8구간~10구간 (목요산악회 20241115)
(8구간) 구름정원길 (거리 5.2km, 소요시간 2시간30분, 난이도 중)
(9구간) 마실길 (거리 1.5km, 소요시간 45분, 난이도 하)
(10구간) 내시묘역길 (거리 3.5km, 소요시간 1시간45분, 난이도 하)

진관사 (津寬寺)

창건기
진관사(津寬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로,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쪽의 진관사로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며,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1011년(顯宗 2년)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집니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誌)」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고려시대의 진관사
이후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라 하여 고려시대 여러 임금이 왕래하면서 왕실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게 됩니다. 1090년(宣宗 7년) 10월에 선종(宣宗)은 진관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성대하게 봉행하였으며, 1099년(肅宗 4년) 10월에는 숙종(肅宗)이 진관사에 친행하였고, 그 후 1110년(睿宗 5년) 10월에는 예종(睿宗)이 진관사에 순행하는 등 역대 왕들이 참배하고 각종 물품을 보시하는 국찰(國刹)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진관사와 수륙사
고려시대 이래로 역대 왕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진관사는 조선시대에 수도를 서울로 옮기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륙재(水陸齋)의 근본도량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권근(權近)이 지은『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에 그 전모가 전해집니다. 1397년(太祖 6) 정월에 태조는 내신 이득분(李得芬)과 조선(祖禪)스님에게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라일로 죽어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할 것을 명하게 됩니다. 이에 이득분과 상충달(尙忠達), 지상(志祥)스님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답사한 결과 수륙재를 열기에 가장 적합 곳으로 진관사를 선정하게 됩니다. 수륙사 건립은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쟁에서 죽어간 고려왕실의 영혼을 기리는 목적에서였으며, 내면적으로는 불안정한 국민정서의 동요를 막고 조선왕실의 안정을 꾀할 목적도 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후 태조는 진관사에 수륙재(水陸齋)를 개설하도록 공사를 지시하고 절에도 행차하였으며, 1397년 9월 낙성식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이에 고려시대 역대 왕들의 지원을 받던 진관사는 조선왕조의 국가적 수륙재(水陸齋)가 개설되는 사찰로서 다시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당시 진관사에 조영된 시설물은 모두 59칸으로, 상,중,하단의 삼단을 기본구조로, 중,하단에 행랑이 연이어 들어서 있는 왕실사찰로서의 위엄과 규모를 갖추게 됩니다. 이후 불교를 배척하던 태종 역시 1413년(太宗 13)에 진관사에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절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가 열려 조선왕실의 명실상부한 수륙도량으로서 인정받게 되었으며, 국찰(國刹)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세종 때에는 1421년(世宗 3)에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재를 올린 이후부터 왕실의 각종 재를 봉행하는 사찰로 국가에서 정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세종은 1442년(世宗 24)에 진관사에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들을 학업에 몰두하도록 하였습니다. 독서당 건립 후 진관사에서는 학사들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서민들까지 애용하는 전국민의 사찰로 확대되었습니다. 또 1452년(文宗 2)에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지는데, 1463년(世祖 9)의 화재로 일부가람이 소실되어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 후 1470년(成宗 1)에 벽운(碧雲)스님이 다시 중건하고, 1854년(哲宗 5)과 1858년에 중수되었으며, 1879년(高宗 16)에는 당두화상(堂頭和尙) 경운(慶雲)대선사가 큰방 34칸을 지어 국찰로서의 대가람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소지汝其沼址

삼각산 의상능선 오르려면 백화사 골짜기 입구의 여기소경로당 자리잡은 여기소터를 지난다
조선조 숙종 때 북한산성 쌓으려 동원된 지방 관리 만나려 온 기생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몸을 못에 던져 빠져 죽었다. 그녀의 사랑이 잠긴 못이다. 깊이 새긴 화강암 표지석으로
못 이룬 사랑을 전하고 있다. 성공한 사랑은 흘려듣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는
사람들의 가슴을 쥐어짜 쉽사리 잊히지지 않는다.


내시부 상약 신공 묘역

비지정 문화재명 내시부 상약(尙藥) 신공(申公) 묘역
소재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 42 (은평둘레길 4구간 초입)
상약(尙藥)이란 환관 중에서 궁중에서 쓰는 약에 관한 일을 맡은 내시부 종3품직(2명)을 말한다. 묘비 뒷면에는 1637년 (인조 15년) 2월에 조성했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묘표는 사각현 비좌(碑座)에 비 머리가 둥근 원수형(圓首形) 비신(碑身)을 꽂아 세운 형태이다. 비신 전면에는 “통정대부행내시부상약신공지묘(通政大夫行內侍府常藥申公之墓)”, 후면에는 “숭정십년이월 일장(崇禎十年二月 日葬)”이라고 새겨져 있다.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慶川君 李海龍 賜牌地 松禁碑)

경천군 이해룡 사패지 송금비(慶川君 李海龍 賜牌地 松禁碑)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전후 일본과의 화평 교섭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여 경천군으로 봉해진 이해룡(李海龍)에게 1614년 광해군이 하사 한 토지의 경계 지역 내의 소나무를 무단으로 침범 혹은 벌목하는 것을 금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송금(松禁)이란 역사적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목재를 확보하기 위하여 소나무의 생장에 적당한 곳을 선정하여 보호하고 벌목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일찍이 고려 시대부터 시행되어 조선시대에는 금산(禁山)과 봉산(封山)의 제도가 있어서 소나무 숲의 벌목이 엄하게 다스려졌다. 이 송금비는 그동안 문헌상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 임업정책의 실례를 방 증하는 유물로서, 이 비를 통해 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일관되게 시행된, 오늘날의 자연환경 보존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시대 송금 정책의 일면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송금비는 모두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이 비가 송금비로서는 전국적으로 유일한 사례이자 조선시대 임업사에서 중요한 유적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2기가 확인된 바 있으나, 현재 2기 중 1기는 소재 확인 중에 있으며 우선 남아 있는 1기부터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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