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추적 – 광개토대왕 청동호우 왜 경주에 묻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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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호우가 말하는 역사의 비밀,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X선 판독을 통해 추적하는 호우의 비밀
1946년 경주 호우총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호우가 발견됐다.
이 호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보다 면밀한 분석을 위해 제작진은 X선으로 호우를 촬영, 판독해 보았다. 호우에 새겨진 글씨는 광개토 대왕의 비문의 글씨체와 흡사했다. 신라왕족의 무덤인 호우총. 신라왕족은 무엇 때문에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호우를 자신의 무덤에 가져갔을까?

신라에는 고구려 군대가 장기간 주둔했다.
일본서기에는 놀라운 기록이 보인다. ‘고구려 왕이 병정 100명을 보내 신라를 지켰다’ 일본서기 고구려 군이 신라에 주둔했다는 기록이다.
서기 400년. 왜(倭)인이 신라를 침범해 위기에 처한다. 신라왕인 내물왕은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 광개토대왕은 이듬해 5만 군사를 출정시킨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출정은 신라영토 내 고구려군 주둔으로 이어진다.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울산의 천전리 암각화에는 대형(大兄)이라는 고구려의 관직 이름 새겨져 있다.
신라의 왕도 경주와 멀지 않은 이 지역에 고구려의 관직이 새겨져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고구려 사람들은 실성왕(實聖王)을 죽이고 눌지를 세워 왕을 삼고 돌아갔다.

삼국유사
고구려는 신라의 왕위문제에 간섭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심지어 신라 왕은 고구려에 직접 찾아가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옛적에는 신라 왕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한 일이 없었는데, 광개토대왕에 이르러 신라 왕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광개토대왕 비문 中

신라 예속의 역사를 말해주는 광개토대왕 호우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대왕 호우 바닥에는 ‘을묘년’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을묘년’은 광개토 대왕 3년 상을 치른 뒤, 첫 제사를 지낸 415년을 가리킨다.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대왕 호우는 역사서가 전하지 않은 신라와 고구려의
진실을 간직하고 있다.

역사추적 6회 광개토대왕 청동호우, 왜 경주에 묻혔나 (2009.01.10.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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