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의 아버지이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의 책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담긴 이야기를 후루룩~ 살펴봅니다! :) * 동일한 책을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 번역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것이 잘못된 영역을 그대로 옮김으로써 발생한 오역이라는 박종현 교수의 의견을 따라 '소크라테스의 변론'으로 소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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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이 그림은 한 번쯤 본 기억이 있을 겁니다. 바로 고대 그리스의 어느 위대한 철학자의 죽음을 다룬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말이죠. 그런데 이 사람이 도대체 왜 죽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고 계시나요? 오늘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살펴보게 될 겁니다. 바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또다른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의 작품,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통해서 말이죠.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제목 그대로 소크라테스가 재판에 회부된 뒤 자신을 변론하는 과정과 그 내용을 다룬 책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에 넘겨진 시기, 고대 그리스는 서서히 쇠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는 주변국 중 가장 거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을 막아냈는데요. 하지만 이후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이,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결성되어 양 진영간 한바탕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무려 30년간 진행된 이 전쟁의 승자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하지만 양쪽 모두 에너지를 크게 소모한 탓에 그리스 도시국가 전반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어버렸죠.
어찌됐든,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소크라테스가 살고 있던 아테네에 과두정을 실시했습니다. 과두정이란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물론 과두정의 중심은 친스파르타 인사와 반민주주의자들이었고요.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논리가 가진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특유의 토론 방식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고 자신의 철학을 꿋꿋하게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가 당시 사람들을 신경쓰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과두정의 주요 인사 중 그의 제자와 플라톤의 큰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겨버리고 마는데요. 바로 아테네가 과두정을 몰아내고 민주제로 회귀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를 시기하던 사람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 가지 죄목으로 이들에게 고소를 당하게 됩니다. 첫째 죄목은 청년을 부패하게 했다는 것이었으며, 두 번째 죄목은 나라에서 인정하는 신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죠. 눈엣가시였던 소크라테스의 입을 틀어막고자, 사람들은 얼토당토 않은 죄목으로 그를 고소했던 겁니다.
소크라테스는 오늘날로 따지면 형사 고소에 해당하는 ‘공소’를 당했습니다. 공소에는 총 500명의 배심원이 배정되었는데요. 우선 1차 투표를 통해 죄의 유무를 따지고, 유죄가 확정될 경우 2차 투표를 통해 어떤 벌을 내릴지 확정하게 되었죠. 재판은 하루 종일 진행되었으며, 피고와 원고에게 각각 3시간 가량 진술 및 변론 시간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나머지 시간은 배심원 선발과 공소장 낭독, 투표에 의한 유무죄 평결, (유죄의 경우) 원고의 구형과 피고의 반대 제의에 따른 진술 및 투표 등에 소요되었죠. 아울러 아테네의 경우 장기 징역형이 없었으므로, 대개 벌금형이나 공민권 박탈, 추방령 또는 사형 등이 구형되었다고 합니다.
뭐, 사실 적당한 사과와 자숙으로도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소크라테스는 철학자 특유의 지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본인의 무덤을 팝니다. 그는 500명의 배심원 앞에 직접 나서 자신이야말로 청년을 참되게 교육하는 '아테네의 양심'이며, 폴리스의 신들을 믿지 않았다는 비난 역시 논의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해 버립니다. 게다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소문에 대해 ‘무지의 지’, 즉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역설하죠. 바로 이렇게 말이죠.
“그러다가 저는 그야말로 겨우겨우 이와 같은 식으로 그 뜻을 알아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현자들로 여겨지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에게로 제가 찾아 간 겁니다. (중략) 그야 어쨌든, 저는 그 자리를 떠나면서, 제 마음 속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사람보다야 내가 더 현명하지. 그건, 실은 우리 중에서 어느 쪽도 훌륭하디 훌륭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하는 것 같은데도, 이 사람은 자기가 실은 알지도 못하면서 대단한 걸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나야 사실상 내가 알지 못하듯, 알고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기 때문이지. 어쨌든 적어도 이 사람보다는 바로 이 사소한 한 가지 것으로 해서, 즉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이 사실로 해서, 내가 더 현명한 것 같아’라고 말씀입니다.“
자, 결과는 어땠을까요? 우선 1차 판결은 너무나 논리적인데다 잘난척이라면 잘난척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탓에 오히려 배심원들의 심기를 건드려 버렸습니다. 유죄판결이 내려진 것이죠. 그리고 2차 판결이 이어졌는데요. 그는 여기서도 선처를 애걸하지도, 적당한 타협안을 제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사형이 구형되었고, 도망치라는 아내와 친구, 제자들의 청을 뿌리치고 독약을 마십니다.
그가 도망 대신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우선 그는 자신이 살아있게 되는 조건으로 아테네에서 추방을 당하거나, 입막음을 당해 철학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삶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은 지혜를 사랑하는 활동, 즉 철학함을 멈추지 않겠다고 이야기했죠. 더불어 죽음에 대한 독특한 그의 입장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둘 가운데 하나이겠기 때문입니다. 그건 이를테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어서, 죽은 자는 아무 것에 대한 아무 감각도 갖지 않거나, 또는 전해 오는 바대로, 그것은 일종의 변화이며 혼에는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이주일테니까요.”
즉, 그에게 있어 죽음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죽음, 즉 고통스럽고 잔인한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사상은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후계자인 플라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그의 일화를 담은 다양한 대화편이 저술되었으며, 플라톤의 사상 역시 많은 부분 소크라테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지죠. 서양 철학의 근간이 된 고대 그리스, 그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철학자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이런 배경을 토대로 만들어졌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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