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70주년] 인천상륙작전의 의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부 이상호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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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뉴스] 2020.09.15
[인천상륙작전 70주년] 인천상륙작전의 의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부 이상호 선임연구원)

앞서 전해 드린 것처럼 9월 15일은 인천상륙작전 70주년입니다. 1950년 6·25전쟁의 전환점이 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우리 국군은 반격을 개시했는데요. 위기에서 오늘날의 대한민국 영토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자세한 이야기 나눠봅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부 이상호 선임연구원 나오셨습니다.

인천상륙작전 70주년입니다. 6·25전쟁에서 판세를 뒤집은 작전인데요. 전쟁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일단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의 모든 역량이 낙동강 전선에 집중되어 있고 인천에 대한 방어능력은 극히 미약해 북한의 증원 또한 기대될 수 없으리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적에게 결정적인 위협이 돼서 낙동강 전선의 적군을 급속히 와해시켰고,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여타 부대들의 공격이 수반됐는데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작전에 의해 인천의 항만 시설과 서울에 이르는 제반 병참 시설이 북진 작전을 위해 이용가능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천상륙작전은 전세를 완전히 뒤바꾸었다는 점과 북진정책을 통해 북한으로의 반격이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큽니다.

그럼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전세가 어떻게 달라지게 됐나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미 해병사단은 9월 16일 인천 시가지 소탕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서울로의 진출 시 후방지역을 안전하게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것이었는데요. 인천지역의 소탕 작전은 미미한 피해를 입고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는 김포비행장의 조기 확보였는데요. 김포비행장은 한강 이북으로의 작전 수행을 위한 교두보 확보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이후 미 해병대가 김포비행장과 경인 국도로 진출하고, 소사 동쪽의 원미산을 탈환해 인천지역을 완전히 수복했습니다. 그리고 9월 18일 제10군단은 작전명령 제1호를 통해 미 해병사단으로 하여금 서울 시가지를 탈환하기 위한 9월 20일 한강도하작전을 감행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럼 이런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들은 뭐였을까요?

인천상륙작전이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재빠른 실행 계획의 수립과 보급, 병력배치를 포함한 완벽한 사전준비, 여기에 작전을 지휘한 맥아더의 결단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9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맥아더는 사단 규모의 병력에 의한 상륙을 감행해 전쟁을 승리로 종결하는 작전을 세웠죠. 해수 작전으로 적의 후방에 우회하여 보급 병참선을 공격하는 일종의 ‘섬 건너뛰기 작전’은 맥아더가 즐겨 사용하는 전법이었습니다. 그리고 8월 24일 인천상륙작전의 지원을 위한 새로운 사령부가 설치되었습니다. 제8군 사령부 자리에 극동군주일군수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웨이블 장군을 임명했는데요. 그리고 27일 미 극동공군과 극동해군을 유엔군사령부의 예하 기구로 통합해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하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은 당시 이를 성공하기 위한 예비 작전의 감행으로 이뤄졌다고 알고 있는데요. 예비 작전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설명해 주시죠?

인천상륙작전은 8월 12일에 계획되었고, 약 1달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9월 15일에 전격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면인데요. 인천상륙작전 준비를 위한 예비계획인 트루디 잭슨 작전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보겠습니다. 팔미도 정보작전이라고도 불리는데요.

팔미도 정보작전은 미 극동군사령부 산하 G-2에 의해 준비됐고 미국의 팔미도 정보작전의 책임자는 클라크 해군 대위였습니다. 영흥도 근해로 진입하여 이곳에 상륙했는데요. 이곳에서 청년단을 조직하고, 이들을 편성해 경계근무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북한군의 병력 상황 등의 정보를 탐지하였습니다. 클라크첩보대가 매일 밤 맥아더 사령부에 이 내용을 보고했는데요. 그리고 작전 당일인 9월 14일이 되자 클라크첩보대는 명령대로 팔미도에 상륙하여 지정된 시간에 등대에 점화하였고, 이를 발판으로 유엔 연합군의 함대가 비어 수로를 통해 상륙작전을 개시해 성공하였습니다.

일부에서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의미를 낮게 보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중국과 북한이 사전에 알고 있었고 따라서 이는 기습작전이 아니었다는 평가절하인데요.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요?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이 작전이 완전한 기습과, 성공이라는 게 일반적이었죠. 그러나 최근 일부 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평가가 내려졌는데, 북한의 최고수뇌부가 이미 1950년 8월 21일 남한군과 미군의 인천지역 상륙기도에 대해 인지해 해안 상륙에 대비한 명령을 하달했고 8월 28일 김일성의 명령으로 인천지구에 대한 방어 작전이 개시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주장 이외에도 최근에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중국 지도부가 이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만약 북한이나 중국이 미군의 상륙작전을 알았다면 인천상륙작전 시 인천 앞바다에 부설된 기뢰의 숫자가 터무니없이 적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연구를 통해 밝혀질 부분은 밝히되, 전쟁사에 대한 가치와 기록은 별개의 문제로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부 이상호 선임연구원과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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