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와라 츠즈코 - 목포의 눈물(木浦の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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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원로 여가수 스가와라 츠즈코의 회상

우리의 민요와 대중가요를 부른 일본 원로 여가수 스가와라 츠즈코(1927~)가 81세였던 2008년 1월이었다. 제국축음기 회사로 출발한 오랜 역사의 테이치쿠 엔터테인먼트 본사 스튜디오에 초대되었다. 가수는 1935년에 발표되어 한국과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이난영 가수의 (목포의 눈물)을 SP 음반으로 들으며 깊은 회상에 젖었다.

1955년 목포의 눈물(木浦の涙)을 번안하여 불렀던 스가와라 츠즈코는 이난영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너무나 많이 들었던 노래로 지금 들어도 역시 훌륭하다)면서 자신의 가수 일생에 큰 영향을 주었던 한국 가요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스가와라 츠즈코 가수가 테이치쿠 엔터테인먼트 본사를 찾은 이유가 있었다. 가수가 보관하고 있었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에서부터 한국 가수의 노래가 담긴 SP 레코드 원판 50여 장을 60년 만에 반환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살펴보자)

가수의 나이 21살이던 1948년이었다. 테이치쿠 레코드 전속 가수였던 그녀는 어느 날 도쿄 스기나미(杉並)에 소재한 녹음실 창고에 쌓인 한글로 인쇄된 SP 레코드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를 지켜보던 녹음실 책임자의 가져가도 된다는 말에 무려 50여 장의 음반을 담아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어보았다고 회상하였다.

가수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표현력에서 깊은 한과 같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노래의 힘에 압도당했다)면서 (아리랑과 도라지와 목포의 눈물에서부터 50여 장의 음반이 긁혀질 때까지 들었다)고 회상하였다. 이어 (한국 가요는 어딘가 귀에 친숙해서, 노래하기 쉽다고 생각했다)면서 당시 언젠가는 이러한 한국노래 들을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늘 매만졌음을 회고하였다.

스가와라 츠즈코 가수가 가져온 50여 장에 이르는 한국 가수의 SP 음반은 테이치쿠 자료실에 존재하지 않는 소중한 음반이었다. 거의 한국 오케이 레코드에서 발매된 음반들로 (이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1932년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설립한 회사 오케이 레코드는 1932년부터 1937년 무렵까지 음반 생산 시설이 없었기에 테이치쿠 레코드의 전신인 제국축음기 생산 시설을 이용하여 음반을 제작하였다. 이후 1938년 제국축음기가 오케이 레코드를 인수하였다. 이 시기에 제작된 음반들이었다.

당시 스튜디오에서 SP 음반을 재생하였던 엔지니어가 SP 음반이 78회전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LP 음반 회전수인 33회전으로 재생하였다. 이렇게 재생된 한국 가요를 듣자마자 스가와라 츠즈코 가수는 바로 손을 저었다. (아니! 틀리다-いいえ! 違う)

이렇게 한국 가요를 외우듯 들었던 스가와라 츠즈코는 특히 한 장의 음반에 담긴 깊은 관심과 인연을 회고하였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운항하던 관부연락선에 담긴 애환을 노래한 1937년에 발표된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노래였다.

스가와라 츠즈코 가수는 (저쪽 말이기에, 가사에 의미는 몰랐지만, 멜로디 분위기에서 느낌을 알았다)며 (그 이상으로 장세정 가수의 노래가 좋아서 무수히 듣고 또 들었다)고 말하였다. 이어 1951년 7월 당시 인기가수 타바타 요시오의 음반 뒷면이 주어지자 가수는 부르고 싶었던 장세정 가수의 노래를 번안한 연락선의 노래(連絡船の唄)를 부르게 되었다고 회상하였다.

이어 (한국의 장세정 가수처럼 노래하려 노력하였지만, 일본인인 나는 할 수 없음을 깨달아 나의 노래로 표현하였다)고 덧붙였다. 이어 의미가 깊은 말을 이어갔다.

스가와라 츠즈코 가수는 NHK 홍백가합전 제1회 2회 그리고 4회 출전에 이어 7회 때인 1956년 한국 가요를 번안하여 부른 (연락선의 노래)를 부르려 하였을 때 방송사에서 노래를 거절하였다고 밝혔다. 가수는 (퇴폐적이라는 이유였을까?)라는 혼잣말을 하며 팬들의 뒷받침으로 그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면서 (계속 노래하고 싶었습니다만)이라는 여운이 있는 말을 남겼다.

가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1956년 불렀던 한국 가요 번안곡 (연락선의 노래)가 크게 히트하고 나서 도쿄에서 열린 한일 가요제와 같은 공연에 일본 측에서는 가수 자신이 한국에서는 장세정 가수가 출연하였다.

(그때 장세정 가수의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연락선 노래는 일본에서는 이제 당신 노래야! 나는 다른 노래를 부릅니다) 이렇게 말하고서 장세정 가수는 목포의 눈물을 노래하여 눈시울이 촉촉해지고 말았다고 회상하였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산케이 신문에 게재된 부분적인 이야기로 필자는 본문의 사실성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시대 상황을 정리하였다. 이상과 같은 내용에서 필자는 몇 가지를 짚어본다.

첫째. (한국의 민요 아리랑과 도라지 그리고 대중가요 목포의 눈물에서부터 50여 장의 음반이 긁혀질 때까지 들었다)는 가수가 현재 일본 최고의 원로 여 가수라는 사실은 우리나라 훈장을 받아 마땅하다.

둘째. (저쪽 말이기에, 가사에 의미는 몰랐지만, 멜로디 분위기에서 느낌을 알았다)는 말과 (한국의 장세정 가수처럼 노래하려 노력하였지만, 나는 일본인이기에 할 수 없음을 깨달아 나의 노래로 표현하였다)는 말에서 자신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가수의 말을 존중한다.

셋째, (당시 NHK 방송에서 (연락선의 노래)를 거절하였다면서 (퇴폐적이라는 이유였을까?)의 혼잣말로 말한 부분은 한국 번안 가요이기에 방송사에서 거절하면서 (퇴폐적이라는 이유)를 들었던 어이없었던 사유를 말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어 (계속 노래하고 싶었습니다만) 이라는 여운을 남긴 말은 한국 번안 가요 (연락선의 노래)를 부른 후 NHK 홍백가합전 출전이 더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을 의미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넷째.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한국의 민요 아리랑과 도라지를 부르게 된 배경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스가와라 츠즈코 가수는 2006년 봄에 한국을 처음 여행하였던 사실을 알리면서 남긴 말이 있다. (현역 시대에는 왠지 허리가 무거웠다. 여행은 한국의 노래를 부르게 하면서… 낡은 SP 레코드로 들었던 곡도 다시 들었다. 참을 수 없이 그리웠다)

필자는 스가와라 츠즈코 가수가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말한 사실을 존중한다. 그러기에 더욱더 6.25 전쟁 중에 아리랑과 도라지를 부른 배경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었으면 한다. 가수는 한국에서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할 일본 가수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어제 페이스북 댓글에서 일본 현지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는 분들이 (한국인 가수라 하여도 이제 와 공개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글을 남겼다. 일본 현지에서 일본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분들의 소중한 헤아림을 깊게 매만진다.

이일영(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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