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쉐우민 수행 도경스님 법문 [자비, 앎, 마음, 사띠] 마인드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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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스님 #위빠사나 #마음
도경스님 인터뷰 법문 (2020.6.21. 담마숲)
쉐우민 숲속 | 도경스님 담마숲법회 20200621(인터뷰)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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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는 자비의 종교가 아니라 무 자비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자비는 측은지심을 갖고 내 기준으로 도와주므로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번뇌의 에너지가 생겨서 내가 괴로워진다. 불교의 자비는 타인 기준으로 화가 줄어들고 지혜가 생긴 상태에서 말과 행동으로 도와주고 그 사람이 잘되지 않아도 내가 괴롭지 않으므로 무 자비라고 할 수 있다.

자비롭기는 힘들지만 화는 줄일 수 있으므로 불교는 화와 고통에 관심을 둔다. 화를 알면 화의 에너지가 사라지고 자비심은 생겨난다. 번뇌는 동일시의 에너지를 먹고 커지므로 화가 내 것이라는 믿음은 화를 더 커지게 한다. 불교는 화와 고통을 줄여가는 종교이며 화를 지켜보고 이해하여 줄여감으로써 자비심을 일으킨다.



2. 쉐우민 수행을 처음 하는 사람들은 좌선과 경행의 비율을 50:50으로 하는 것이 적당하다 질문을 할 때 '뭐가 일어나고 있지?' 하면 내가 기대하지 않아도 관심이 생기고 넓어지고 밝아진 느낌이 된다. 그래도 수행이 잘 안되면 엉덩이에 어떤 느낌이 있지? 머리에 어떤 느낌이 있지?라고 구체적으로 질문하고 그래도 안되면 일어나서 걷는다.

부처님 시대에 경행대가 있었으며 부처님께서는 소나 비구에게 현이 탱탱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아야 소리가 제대로 나듯이 적당하게 경행하도록 가르치셨으며 아난다 존자는 경행을 하다가 잠시 누우려는 찰나에 아라한이 되어서 결집에 참여할 수 있었다. 경행은 삶 속 수행이 되게 하며 마음의 균형이 맞게 되어 지혜가 생기게 한다



3. 바른 견해 : 자연의 이치이다, 대상이다.

일상 삶 속에서 사띠의 지속은 무의지적으로 알 때 가능하다

자연의 이치는 관념의 측면과 법의 측면이 있다

경행을 하면서 자갈이나 풀을 밟았을 때 느낌과 소리가 '다르다'라고 하는 것은 관념이다. 법은 이 순간 앎이다

자갈을 밟을 때 자갈 소리는 관념적이고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갈 밟을 때 그 순간 아는 것, 법의 일어남이 중요하다. 법은 이 순간 앎이며, 앎의 일어남이 자연의 이치이다

풀을 밟았을 때 어떤 앎이 일어난다. 느낌으로 분류되는 것이며 앎이 일어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앎의 일어남, 법의 일어남 자체가 자연의 이치이다

앎의 일어남, 법의 일어남이 무아이다

내용에 대하여 자연의 이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 아는 것, 아는 현상 자체, 일어난 것 자체가 자연의 이치이다. 그렇게 지혜의 의미를 부여한다.



4. 이것저것 쉽게 알 때, 수행이 잘 될 때 법의 방향을 본다

'아는가?' '알아지는 것을 아는가?' 대상을 구체적으로 질문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법을 바른 견해로 보는 것이며 이때 법은 실재하는 법이다

법에는 관념의 법과 실재하는 법이 있다

내 마음에 아는 모든 것은 관념이다. 잘 알아질 때 즉 선명하고 여러 가지를 알면 관념 뒤에 있는 법을 알아본다.

그냥 들리는 소리, 그냥 알아지는 것은 관념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떻게 시계를 알았는가? 뭔가 보였으니 보는 게 있고, 뭔가 봤으니 보이는 게 있다.

법은 관념을 가능하게 했던 실재하는 작용이다. 법은 관념에 의지해서 작용한다. 법은 불변하는 뭔가가 아니며 우주 만물에 항상 있는 뭔가가 아니다. 관념을 기반으로 해서 법이 정의된다. 우리가 아는 것은 관념밖에 없기 때문에 2500년 전 부처님께서는 관념을 이용하여 실재를 가르치셨다. 관념 이면에 있는 법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아는가?'라고 묻고 '응, 알지' '아네.'라고 이해되면 법을 아는 것이다. 법의 특성을 알려면 법을 알아야 한다.



5. 연기는 법이며 법이 일어나는 모습이다. 즉 보여지는 게 있는 순간 보는 게 생겼다

보는 마음과 함께 있는 보여지는 것이 법이며, 보여지는 것과 함께 있는 보는 마음이 법이다. 법과 법이 함께 있을 때가 법이며 연기이다. 즉 쌍방이 쌍방을 규제한다.

보는 마음이 있을 때 법이 있고 보는 마음이 없을 때 법이 없다는 것이 연기이다. 함께 없을 때는 불교의 관심도 없다. 함께 있다가 사라진다.

연기는 짚단 두 개를 세워 놓은 것에 비유된다.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 하나도 없다 안식이 없으면 안경도 없다 보는 마음이 없으면 보여지는 것도 없다.

사람들은 흔히 보여지는 것이 있고 보는 것이 있다고 시간의 순서를 정한다. 그러나 같이 일어나고 같이 사라진다.



6. 연기는 만남의 일어남이다. 법과 법이 함께 일어난다.

봄이 있을 때 보여지는 대상과 보는 마음이 있다 누가 나이고 누가 객체인가? 그런데 연기로 들어가면 나는 봄의 존재이다. 이 둘은 다 함께 내 존재를 구성한다.

보여지는 대상이 내 존재이고 소리가 내 존재이고 색수상행식의 물질이 나이고 느낌이 나이다

만남이 연기이고 내 존재이다. being으로서 나, 존재로써 나이다. 너와 나는 하나다. 인격체로서 너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앎을 일으키는 하나의 법으로써 너, 그럼 나는 뭐지? 일귀하처?

나는 신기한 존재이다. 택법각지의 에너지가 수행하게 하고 '나는 어떤 존재구나' 하는 이해가 생긴다.

나는 일어남이다. 관찰과 이해를 통해 자유로워진다.



7. 사띠와 앎를 구별할 필요는 없다.

실재 있는 것을 알면 된다. '아는가?' 질문해서 '아네' 하면 이해한 것이고 지혜가 있는 것이다.

'알아지고 있는 대상을 알고 있나?' 질문하는 것은 사유가 아니라 지혜이다. '아네' 하는 이해는 지혜의 느낌을 만든다. 우선 할 일은 사띠를 지속하는 것이다.

마음이 옮겨가지 않고도 알 때 '아는가' 물어본다.

알아지는 것에서 물러나면 자유로움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마음은 고요하다. 무의지적인 알아차림이다



8. 자세와 수행의 관계

자세를 바르게 하려는 것은 집착이다.

수행 초반에는 노력으로 깨어있고

수행 중반에는 사마디로 깨어있고

지혜가 좋아지면 '관심'으로 깨어있다.

누워서 수행을 하면 노력이 없으니 잠이 온다. 그래서 적당하게 중간 지점인 수행 자세가 좌선이다. 마음의 상태로는 누워서 하는 것이 최고이다.



9 .마음이 넓어졌다는 것은 바른 사띠이다.

마음이 탁 던져져도 여러 가지 것을 안다는 것은 가만히 있어도 반응하지 않는 사마디가 있다는 뜻이며 또한 대상이 여러 가지라는 것은 노력이 있다는 것이다. 사마디와 노력이 균형을 이룰 때 '아는가?', '알아지는 것을 아는가?'라고 묻는다.

지혜는 고요함과 활발함이 균형을 이룰 때 생긴다. 고요함은 대상에서 물러나는 것이며 활발함은 대상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이다. 오근, 칠각지, 팔정도도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경행하면서 가볍게 알아차림 한다

경행은 삶과 수행의 동질성이며 무의지 상태에서 앎이 확 일어나고 마음 상태가 다른 차원으로 바뀐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바르게 보면 된다.

나 자체가 번뇌이다. 수행은 나를 줄여가는 것이다. 느낌을 알면서 ‘자연의 이치다, 대상이다.’라고 한다.



10. 햇볕에 대한 질문

햇볕에 대해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을 때

이게 느낌이구나 하면 관념,

마음이 느낀다 하면 법,

무엇이 느낀다 하면 법,

이 느낌을 안다 하면 법이다.

자기 마음에 형성화된 것, 그 알아진 것 자체가 관념이다.

법은 그 관념을 가능하게 했던 작용이다.



11. 우울감

위빠사나에서는 내게 알아지는 것을 대상으로 수행한다.

우울감을 대상으로 바르게 보려고 노력한다. 우울감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진다. 우울감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마음이 커져간다. 마음이 커져 가면 가치가 줄어든다. 가치가 줄어들면 이것을 일으켰던 마음의 조건이 변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드러난 것을 바르게 봐서 드러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못하는 것을 할 필요는 없고 드러난 것만 다루면 된다.



12. 화의 경향

해결책을 찾는다. 마음이 익숙해지면 찾을 수 있다. 그 마음을 보고 이해하고 그 마음으로부터 물러난다.

화가 난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화의 상황은 지나갔다. 화가 알아지고 있다. 화를 바라보고 이해하면 화가 있든 없든 상관 없어진다. 화가 있든 없든 상관 없어지면 화가 없어지고 화의 가치가 없어진다.

부처님께서는 마라를 보고 '너, 마라구나' 하셨고 마라는 '붓다가 나를 보았다' 하면서 사라졌다

화를 화로 알고 화로부터 자유로워지면 화를 나게 했던 조건에 대한 집착이 줄어든다.

이건 이렇게 되어야 하고, 저건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마음의 기본적인 방향이 변화되고 삶에 대한 태도가 변화된다. 알아지는 것을 바르게 알아간다. 화를 보며 화를 이해하듯이 소리 들으며 소리를 이해하고, 느낌을 알고 느낌을 이해한다. 법의 이치는 똑같으므로 어떤 대상이 되었든 수행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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