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마을구경] 개포면 경진리, 금리 | 폐교 경진분교 | 옥동교회 | 폐가 | 시골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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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진리(京津里)
검바우, 갈가리, 노포(蘆浦), 검암(劍岩)
예안(禮安) 김씨(金氏)들의 집성촌이며 옛 노포면(蘆浦面)의 중심마을이다. 김윤안(金胤安(1550년)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앞의 큰 바위가 모양이 칼처럼 생겼다 하여 검(劍)바우라고 했으며 또 갈대가 우거진 곳이었다고 갈가리라고도 했다. 이 마을 300번지는 노포면소(蘆浦面所)자리이다.

신옥동(新玉洞), 교회(敎會)마을, 교회촌(敎會村)
옥동(玉洞) 북쪽에 100여년전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으로 신옥동(新玉洞)이며 6.25사변 이후 마을앞에 교회(敎會)가 서면서 교회마을로 통한다.

옥골, 옥동(玉洞), 옥산동(玉山洞), 옥개동(玉開洞)
동래(東萊) 정씨(鄭氏) 집성촌 이며 마을터가 환옥(還玉)모양이라 하여 옥골 또는 옥동이라 불린다. 또 조선초 옥계(玉溪) 신달정(辛達廷)이 여기 살면서 마을 이름으로 호(號)를 삼았다.

서울나들이, 경진(京津)
한천(漢川) 내성천(乃城川)이 합류되는 곳에 있는 마을이다. 영남(嶺南)의 선비들이 서울로 과거(科擧)보러 갈 때 이 나루터를 건너 조령(鳥嶺)을 넘어가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었으므로 조선말까지는 매우 붐비던 곳이다. 특히 이곳은 벙어리도 3년만 머물면 의식(衣食)걱정은 없을 정도로 돈을 모을 수 있으나 돈을 벌면 이 마을을 떠나야 살림을 지킬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3대(代)를 사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갱잇골, 학교앞
1962년 경진국민학교(京津國民學校)가 개교되기 전에는 들판이었으나 교통이 불편한 소릿골 주민들이 이 곳으로 옮겨 와서 마을을 이루었다.

소릿골, 소옥동(小玉洞)
신안(新安) 주씨(朱氏)들이 우리나라에서는 한 곳 뿐이라는 주자(朱子)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사는 마을이다. 뒷산에 짐승들이 우글거리고 그 짐승들 울음 소리가 밤낮 들려오던 곳이므로 소릿골이라고 불렀다 한다.

새터
서울나드리 마을 북서쪽 큰길가에 새로 된 마을, 처음에는 서울나드리 나루터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겼음.


금리(琴里)
짓골, 집골, 지동(池洞)
구릉을 배경으로 동남향(東南向) 하고 있는 이 마을은 옛날에 지씨(池氏)들이 마을 앞에 못을 막았다 하며 청주(淸州) 한씨(韓氏)가 사는 마을이다.

거문골, 금동(琴洞)
산세(山勢)가 베틀에서 옥녀(玉女)가 거문고를 타는 모양인 직녀탐금형(織女彈琴形)이므로 거문골이라 하였다. 뒷산은 옥녀봉(玉女峰)이고 마을 앞들 가운데 따로 생긴 봉우리는 베틀짜는 신짝이라 한다. 또 마을 모양이 자연(自然) 길게 생겨서 양지 마을과 음지 마을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청주(淸州) 한씨(韓氏)와 함양(咸陽) 박씨(朴氏)가 주로 살고 있다.
(지명유래)

#예천군 #개포면 #경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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