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연변 연길시 동쪽 교외에 자리잡은 험준한 (성자산)성-(城子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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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시 동쪽 교외에 자리잡은 험준한 산성---산 전체가 하나의 성새인 성자산산성입니다. 가파로운 산봉우리와 절벽들이 말발굽형태로 이어져 천연적인, 거대한 환형 성새를 이루고 있습니다. 산을 에돌아 흐르는 부르하통하는 이 성새의 천연적인 해자로 되여주었습니다. 산봉우리와 산등성이들에는 길이가 4454메터에 달하는 성벽이 남아있습니다. 지세가 험하다 보니 산성은 방어하기 쉽고 공격하기 어려운 특점을 갖추고 있습니다.
산성의 동쪽, 북쪽, 서쪽, 동남쪽에는 모두 성문이 하나씩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중, 산골짜기의 입구에 위치한 동쪽과 북쪽 성문은 주요한 통로입니다. 북문부근에는 성내외를 관찰하는 감시대가 있습니다. 해발이 390메터에 달하는 서쪽의 산봉우리는 성자산의 주봉입니다. 이 곳에서 서쪽의 부르하통하와 남쪽의 하룡촌, 해란강 그리고 모아산과 마반산의 봉화대유적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남쪽의 연성고성과 하룡고성 및 서쪽의 소영고성, 북대고성 등 발해시기의 고성 유적들도 한눈에 안겨옵니다. 이러한 유적들은 모두 성자산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성자산성의 서문과 가까운 곳에는 비교적 잘 보존된 성벽유적이 남아있습니다. 사각이 분명한 장방형 석재를 쌓아만든 것으로 지금도 의연히 아주 견고합니다. 손으로 성벽을 만지면 마치 선인들의 체온을 감지할 수 있는 것 같아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기원 3세기에 중국의 학자 진수가 창작한 (삼국지)의 기재에 따르면 두만강 하류지역을 중심으로 고구려부족의 통치를 받았던 북옥저민족이 살고 있었답니다. 기원 98년에 고구려 태조왕은 성자산성을 시찰하였다고 합니다. 전하는 데 의하면 성자산성은 고구려 책성부였다고 합니다. 기원 224년에 고구려의 동천왕은 조조가 세운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한 후 북옥저로 도망쳐왔다고 합니다. 기원 285년에는 부여왕실마저 이 곳으로 옮겨왔습니다. 기원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되기까지 성자산성은 줄곧 고구려 동북부의 군사요충지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고구려가 멸망된 후부터 698년까지 발해국은 고구려 동북쪽의 옛땅을 수복하였는 바 성자산성도 자연스레 발해국의 령토로 되였습니다. 발해국 시기에도 성자산성은 계속해 책성으로서의 립지를 굳혔습니다. 당시 '책성된장'은 중원일대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기원 926년에 발해국이 거란족에게 멸망되기 전까지 성자산성은 줄곧 발해국의 군사요충지였습니다. 거란족이 료나라를 건립했고 녀진족은 금나라를 세우고 동북과 중원일대를 정복했습니다.금나라 후기에 와서 금나라의 료동선무사였던 포선만노가 1214년에 금나라를 배반하고 동하국을 세웠습니다. 기원 1216년, 포선만노는 수도를 성자산성에 옮겼습니다. 동하국은 16년간 유지하다가 기원 1233년 몽골군대에 멸망되였습니다.따라서 성자산성은 명실에 부합되는 황성옛터이기도 합니다.
비록 성내의 거주지는 이미 경작지로 변했지만 주위에 널려있는 기초돌과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여러가지 무늬가 새겨진 고구려와 발해시기의 기와쪼각이나 도자기 또는 사기쪼각들도 어렵잖게 시야에 안겨옵니다.
이런 물품들외에도 산성내부에서 기타 유물들도 많이 발견되였습니다. 당나라의 개원통보, 송나라, 금나라, 조선숙종대왕시기의 송편통보 등 10여가지 동전들이 망라됩니다. 이 밖에도 구리거울, 금가락지, 목걸이, 고려가마, 화살촉, 말등자 및 ‘남경로구당공사지인', ‘병마안부사지인', ‘구당공사지인' 등 동하국 시기의 구리로 제작된 보귀한 도장들도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연변력사박물관에 보존되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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