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머리말
1장 천하를 꿈꾼 '호쾌'한 천재
1. 안동 김씨의 변족에서 사또의 양자로
세도 가문 장김의 아웃사이더로 태어나다
재종숙의 양자, 사또의 아들로 성장하다
여장부 같은 부인과 딸 그리고 혼외 자식들
2. 사람들 사이에서 빛나는 만능 재주꾼
사람 좋아하고 말 잘하는 '호쾌'한 천재
'시문서화 다 잘하는' 만능 엔터네이너
2장 역사의 전환기, 조선의 근대를 설계하다
1. 과거 시험 수석 합격 그리고 출세
장원 급제와 정관계 진출
새로운 시대의 벤처 관료, 개척사와 포경사가 되다
김옥균의 출세는 특별한 것이였을까?
2. 자본주의 시대, 개화와 자주독립의 길을 찾다
오늘의 중국이 어디 있느냐? 이리돌면 조선이 중국이다
실사구시의 개화에서 대경장의 개화로
'속국'의 굴레, 반청 자주독립을 외치다
양반 세도가의 땅 북촌, 개화이 산실이 되다
3. 사상과 종교의 벽을 넘나들다
김옥균은 유교를 부정했을까?
절에서 개화를 논하고 혁명을 모의하다
기독교의 유입을 인정하다
3장 갑신정변을 연출하다
1. 김옥균은 왜 정변을 일으켰을까?
벽에 부딪힌 개혁,혁명적 정변으로
절박한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는가?
행동대를 포섭하고 정변을 준비하다
2. 3일 천하, 46시간의 정변
첫날(10. 17), 우정총국 연회장에서 혁명의 깃발을 들다
이틀째(10. 18), 정적 제거와 개혁 내각 구성
사흘째(10. 19), 정령의 반포와 청군의 공격
3, '공공의 적'이 된 김옥균과 동지들
김옥균과 동지들의 막다른 선택지, 도망과 죽음 사이
사회적 타살에 던져진 가족들
4. 갑신정변의 평가, 매국과 애국 사이
갑신정변은 왜 실패했을까?
상반되는 평가, 모반 대역에서 애국 혁명까지
4장 다시, 조선을 꿈꾸다
1. 뿔뿔이 흩어진 망명 동지들
암울한 망명자의 길
깊어진 불신의 골, 뿔뿔이 흩어지다
남겨진 김옥균, 권토중래 노리다
2. 조선의 권력, 김옥균의 목을 노리다
고종의 끄나풀, 이재원의 편지와 유혹
고종, 킬러 도해포적사를 밀파하다
일본 정부의 계륵 김옥균, 이래도 저래도 골칫거리
3. 오가사와라 섬으로, 다시 홋카이도로 추방되다
태평양 절해고도, 오가사와라 섬에 유배되다
혹한의 땅, 홋카이도에서 재기를 꿈꾸다
4. '자유해방', 다시 조선의 길을 찾다
정치와 외교의 중심 도시, 도교로 돌아오다
냉엄한 국제 질서를 다시 보다
모험적 정치 행보와 사업 시도
조선, 또다시 자객을 파견하다
5장 예정된 피살, 동북아 삼국을 흔들다
1. 마지막 승부수, 목숨을 건지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조선ㆍ중국ㆍ일본의 합작품, 김옥균 암살
왕조의 마지막 능지처사 그리고 세 개의 김옥균 가묘
2. 김옥균 평가, 애국적 혁명가와 매국적 반역자 사이
6장 경계를 넘어선 인간관계
1. 권력의 칼자루를 쥔 고종과 칼날 위의 김옥균
과거 시험장에서의 설레는 첫 만남
자주독립을 향한 공조와 정변의 묵인
왕권을 위협하는 자, 숨통을 끊어라!
2. '둘도 없는' 혁명 동지에서 절교로 끝난 박영효
불교 토론으로 만나 혁명 동지로
너무 다른 두 사람, 망명지에서 절교하다
'흠점만' 든 박영효의 김옥균 평가
3. 죽동궁 '민씨 왕자' 민영익
민영익의 죽동궁에 드나들던 8학사 김옥균
짧은 동행 그리고 '용납할 수 없는' 형세
서로의 목에 칼끝을 겨누다
4. 미국 공사 통역관 윤치호
제국의 시대, 영어 통역관의 길로 이끌다
마지막 재회의 무대, 상하이
5. 목숨을 건 갑신정변의 동지들
일편단심 김옥균 곁을 지킨 유혁로
최초의 여성 개화당원 고대수
6. 동남제도개척사 시절의 동지들
동남제도개척사 임무중 사망한 탁정식
김옥균을 위해 사지로 들어간 백춘배
그림자처럼 김옥균을 수행한 이의교
7.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은 인간관계
조선의 '영웅'을 아낀 미국 공사 푸트
일본 근대 최고의 지성, 후쿠자와 유키치
'수어지교'를 나눈 도야마 미쓰루
죽어서도 김옥균 곁에 묻히기를 원한 가이 군지
마지막 동행, 와다 엔지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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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김옥균의 집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인 홍영식의 집이 있었다. 홍영식의 집은 한성부 북부 가회방에 있었는데, 현재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입구였다. 그의 집은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곳에 있었으며, 대대로 명문거족이 거주하던 곳이다.
홍영식 집 바로 옆에는 박규수의 집이 있었다. 현재 헌법재판소 안 백송이 서 있는 부근이다. 박규수는 김옥균의 과거 시험 시관이었고, 박영효의 일가였으며 홍영식의 이웃이었다. 이러한 관계로 박규수 집 사랑에는 박영효ㆍ박영교 형제와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같은 젊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서광범 집은 박규수 집에서 바로 아래쪽 지근거리에 있었는데, 안동별궁과 담장을 맞대고 있었다. 현재 풍문여고와 덕성여고 경계 지대나 덕성여고 남쪽 일대로 생각된다.
서광범 집에서 경복궁 광화문과 창덕궁 돈화문을 잇는 길(현 율곡로)을 건너 조금 내려가면 박영효의 집이 있었다. 박영효 집은 한성부 중부 경행방 오순덕계 교동에 있었다. 현재 종로구 경운동 88번지로 천도교 중앙대교당 자리이다. - 69쪽
김옥균의 생부와 양부는 모두 삭탈관직을 당했다. 그후 양아버지 김병기는 파양을 단행하여 김옥균과 양자 관계를 끊어 자신과 집안의 살길을 도모했다. 하지만 친아버지 김병태는 아들의 대역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천안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김독균이 중국 상하이에서 암삵당한 두 달 뒤인 1894년 4월(양5월) 긴급히 교수형에 처해졌다. 자애로웠던 김옥균의 친어머니는 갑신정변 후 남편이 체포될 때 딸과 함께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또 진사였던 동생 김각균은 칠곡으로 도망쳤다가 붙잡혀 대구 감옥에 갇혔다. 김각균이 1894년 갑오농민운동 때 감옥에서 탈주하여 동학당에 가입했다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개화당이 정권을 잡은 갑오개혁 이후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1908년 죽은 자들의 죄명을 벗겨줅 때 그의 이름이 명단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구 감옥에서 젊은 나이에 죽은 게 거의 확실해 보인다. - 131~132쪽
동지들 간에 사회적 신분과 위상을 경계로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양반 세도가였던 김옥균ㆍ박영효ㆍ서광범ㆍ서재필 네 사람은 숙도를 따로 마련하고 일본의 유지나 외국인들을 접견했으며, 행동대원들을 마치 집에서 데려온 집사처럼 부렸다. 이때 김옥균은 주로 유혁로가, 박영효는 이규완이 시중을 들었다. 이러한 처사에 이규완 등이 울분을 터뜨리며 비판하자, 김옥균 등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들에게 사죄했다.
이규완 평소의 태도는 동지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며 조목조목 을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적 어도 계급 사상의 폐단을 바로잡고, 널리 인재 등용을 포방한 공들이 망명한 우리 동 지들에 대하여 이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김옥균 외 가장 신뢰하는 것은 제군들입니다. 정이 형제와 같아 후의에 맡겨 그런 것이지 결 코 가볍게 여겨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동지들 사이가 서먹서먹해졌다. 당시 이규완은 김옥균, 박영효 등을 ‘수령파’로 지칭하고 자신들을 ‘의사파’라고 불렀다. 혁명적 인민평등권을 주장하던 그들도 현실 생활에 서는 신분의 굴레와 관행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150~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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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오늘, 김옥균의 삶의 의미는?
“역사가 부른 혁명가, 시대가 버린 이단아! 인간 김옥균을 새로 읽는다”
역사적 전환기, 전통과 근대라는 이중의 부조리와 모순이 조선 사회를 짓누르던 시대. 이 책은 김옥균의 뒤에는 유교국가 조선이 있었고, 앞에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세계가 있었다는 시대변화를 중요한 배경으로 삼아 문제적 인간 김옥균을 새로이 조명한다.
전통사회에서 근현대 사회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뒤안길에 있었던 상놈(常漢)이 시민사회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 주목해 온 역사학자 박은숙은, ‘풍운아’의 이미지로 굳어진 채 애국과 매국의 양 극단의 평가를 받아온 김옥균에게 새로운 시선을 부여한다. 당대 최고의 문벌귀족이자 엘리트 코스를 밟은 고위관료 김옥균과 그의 동지들은, 조선의 비극에 임해 옛 질서와 새 질서의 연결을 위해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비록 약점이야 많았지만 현명한 선택을 내세우며 얍삽하게 시세를 저울질하는 사람들과는 달랐다. 비록 실패하였다고는 하나 그 차이를 중시하는 태도는 중요하다. 오늘날 재산과 학력을 가진 ‘지도층’이 스스로를 ‘이기적 존재’로만 규정하며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하는 풍조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와 있지 않은가? 김옥균의 삶은 부끄러움 자체를 잃어버린 것 같은 이 시대의 ‘지도층’과 우리 자신에게 보다 더 깊은 성찰과 행동을 촉구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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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때 발표된 개혁안을 일반적으로 ‘정강(政綱)’이라 부르는데 ‘정령(政令)’이라 쓰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 정령이란 왕조의 법제, 또는 국왕의 명령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던 용어이고 김옥균 또한 그런 맥락에서 정령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3일 천하’, 그 긴박했던 46시간의 정변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갑신정변의 마치 답사를 하듯이 동선과 공간구조를 드러낸다. 우정국, 일본공사관, 창덕궁 희정당, 경우궁, 계동궁, 창덕궁 관물헌
정변의 실패 이후 김옥균과 그의 동지들의 선택지는 도망과 죽음 사이였다. 이때 일본 공사 다케조에를 따라간 사람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유혁로, 이규완, 정난교, 신흥희 등 9명이었다. 10월 24일 새벽, 김옥균 일행은 치토세마루를 타고 인천을 타고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이후 김옥균은 살아서는 다시 고국 땅을 밟지 못했던 것이다.
만일 그때 죽지 않았다면, 김옥균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추어졌을까? 친일파, 독립운동가, 무역상, 방랑 시인, 투기꾼……. 무한 상상이 가능하리라. 많은 사람이 박영효처럼 친일파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김옥균이 죽을 때와 자리를 잘 선택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대담한 기질과 모험적 열정,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 조선의 독립을 향한 일편단심 등을 반추해보면, 오히려 만주 벌판의 독립운동가나 세계를 누비는 모험적 무역상, 누군가의 자본을 이용한 광산 경영자 등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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