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기록 특별기획 -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 - 박근혜 영애 참석 - 197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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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서거 (1979. 11. 30)

장례식

─ 1979년 10월 26일 밤,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읍니다.

─ 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유해를 모신 청와대 대 접견실. 영부인을 여의신지 5년 남짓 만에 당신마저 세상을 떠나시니 세 유자녀의 애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이를 지켜보는 겨레의 슬픔도 더 없이 크기만 했읍니다.

─ 다가오는 80년대, 민족중흥의 새 역사를 눈앞에 두고 가신 박정희 대통령. 청와대 빈소에는 고인의 서거를 애도하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줄을 이었읍니다.

─ 수많은 외국의 조문 사절들. 그중엔 미국의 밴스 국무장관과 카터대통령 영식 등 여러나라 조문 특사와 주한 외교사절단들이 저마다 본국 정부의 조의를 전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을 찬양하면서 고인의 서거를 충심으로 애도했읍니다.

─ 박 대통령 서거의 비보는 나라 안팎으로 큰 충격과 슬픔을 주었읍니다. 놀란 가슴을 안고 분향소를 찾는 국민들.

─ 여기는 청와대 별관 분향소. 이곳에도 애도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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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칠줄 모르는 국민들의 애도에 답하고저, 이곳 별관 분향소에 나온 큰 영애를 붙들고 슬픔을 함께 나누던 사람들.

─ 정부는 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장례를 국장으로 모시기로 하고, 그 날짜를 1979년 11월 3일로 정했읍니다.

─ 9일장으로 모시는 동안 전국에는 1700개소의 분향소가 마련된 가운데 국민 모두가 일손을 놓고 그 앞에서 오열했읍니다.

─ 여기는 중앙청 앞뜰에 마련된 분향소.

─ 당대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후세의 사가들이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항상 염두해두고 일한다던 박정희 대통령. 그 목소리 찾아 비통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읍니다.

─ 추모의 행렬은 밤에도 계속됐읍니다.

─ 국장일이 가까워질수록 전국의 분향소로 향하는 조문행렬은 그 수를 더해갔읍니다.

─ 살아생전 그토록 아껴주시던 불우기능청소년들과 배우면서 일하는 공단야간학교근로청소년도 박 대통령의 비보에 울음을 멈추지 않았읍니다.

─ 또한 전세계에 나가있는 재외 112개 공관에서도 박 대통령을 애도하는 조기를 달고 분향소를 마련했으며, 특히 자유중국과 태국을 비롯한 21개국에서는 11월 3일을 애도일로 정하고 조기를 달아 고인을 추모했읍니다.

─ 우리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국장이 거행되는 1979년 11월 3일. 이날따라 서울 거리에는 아침부터 안개가 깔려있었읍니다.

─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애도하려는 시민들은 아침 일찍부터 국장 행렬이 지나갈 연도로 모여들었읍니다.

─ 이날 아침 9시, 고 박정희 대통령의 발인식이 청와대 뜰에서 엄수되었읍니다. 국화송이로 뒤덮인 영구차 유리창 안에 대형 태극기에 싸인 박 대통령의 유해.

─ 영원한 이별의 순간, 16년간 정들었던 청와대를 떠나가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해. 지난날 이 청와대에서 화목하셨던 내외분의 모습. 목련꽃이 만발할 때면 가족과 함께 자주 거니시던 정든 뜰을 말없이 떠났읍니다.

─ 육해공군의 사관생도와 고인을 측근에서 모시던 청와대 직원들의 전송을 받으며 한걸음 한걸음 중앙청 영결식장으로 향했읍니다.

─ 영구차가 청와대 정문을 벗어날 때, 62년의 생애를 마지막 송별하는 예순두발의 조포소리가 울려퍼졌읍니다.

─ 중앙청으로 향하는 삼청동 거리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통곡으로 전송을 했으며, 고인을 마지막으로 뫼시던 군병원의 장병들도 경례를 올렸읍니다.


영결식

─ 이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유해가 중앙청에 들어섰읍니다.

─ 47개국 조문사절과 국내외 각계인사 2천3백여명이 일어서서 7만2천여송이의 국화꽃으로 덮인 고인의 유해를 맞이했읍니다.

─ 중앙청 광장에 마련된 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결식장. 영결식이 시작된 이날 오전 10시.

─ 식순에 따라 고인에 대한 묵념이 있었는데, 이 시각에 맞추어 전국적으로 1분 동안 고인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올렸읍니다.

─ 이어서 장례위원회 부위원장인 신현확 부총리는 고인의 약력과 업적을 보고했읍니다.

─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출생했읍니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던 1937년부터 3년동안 문경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대통령 재직시에 가끔 그 고장을 찾아 감회어린 한때를 보내기도 했읍니다.

─ 국사를 맡은 대통령으로서 언제나 확인행정의 시범을 보이며, 이 나라 방방곡곡을 쉴 새 없이 다닌 박정희 대통령.

─ 모든 국민이 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하나로 뭉쳐 부지런히 일하고 서로 도와서 인정이 넘치는 사회가 될 때 참으로 부강한 조국에 우리는 살게 될 것이라고 늘 강조하던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대통령은 겨레와 함께 고락을 같이 해왔읍니다. 큰 재난을 당한 어느 현장에서나 국민을 위로 격려하며 최선의 대책을 서두르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을 우리는 수많이 기억합니다.

─ 부강해져가는 나라의 힘을 사회 복지로 돌려서 가난한 겨레를 위해 마련한 의료 시혜.

─ 땀흘려 일하는 근로 청소년들.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며 그들의 처우에 각별한 배려를 해주었고 10개의 공장이 서는 것을 보는 때보다 열심히 일하는 청소년들을 볼 때가 더욱 마음 든든하다고 말한 박정희 대통령.

─ 가난한 가정 환경으로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 청소년들을 위해 공단 안에 야간 학교를 세우게 하여 일하면서 배울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진학의 꿈을 다시 찾은 소녀들이 낮의 피로를 잊은채 열심히 공부하는 그 교실에서 우리는 자주 당신의 모습을 보아왔읍니다.

─ 조국의 명예를 드높인 운동선수들과 함께. 때로는 경기장에서 관중들과 함께.

─ 기자들과 만나 나라 살림의 소상한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읍니다.

─ 농촌에서 자란 어린시절에 겨레의 가장 큰 서러움이 가난이란 것을 뼈아프게 체험한 박정희 대통령.

─ 민족의 불우한 역사를 숙명처럼 여기고 가난을 되풀이하던 우리 농민들을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 운동에 나서게 하여 큰 성과를 가져왔읍니다. 박 대통령은 이 과정에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려와 하면된다는 신념을 일깨워주었읍니다.

─ 아름다운 국토를 가꾸기 위해 제창한 자연보호 운동.

─ 박 대통령은 국난 극복의 의지가 담긴 선열들의 유적을 가꾸어 그 호국의 정신을 길이 후세에 전하게 하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우리 민족의 문화와 유산을 다시 찾아 그 자주적 정통성을 이어받아서 우리의 정신적 지주로 삼자고 했읍니다.

─ 박 대통령은 경제력이야말로 국가안보와 민주주의 실현의 수단이 된다는 굳은 소신을 가지고 일했읍니다. 그 결과 이 나라를 후진 농업국으로부터 선진 중화학공업국으로의 발돋움이 가능할 만큼 성장시킨 것은 세게를 놀라게 한 역사적 사실로 평가되고 있읍니다.

─ 네 차례의 걸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성공시키면서 우리는 박 대통령의 지도 이념을 엿볼 수 있었으니, 그것은 대세의 흐름 속에서 꼭 해야한다고 판단했을 때 반드시 결단을 내리고, 실현 가능한 능률적 방법으로 일을 추진하는 것이었읍니다.

─ 남북으로 갈라진 비좁은 국토에 수많은 인구와 자원마저 빈곤한 우리 한국을 부강하게 만드는 길은 오직 공업 입국과 수출 진흥이라고 내다본 박 대통령.

─ 60년대 초, 겨우 3천만불이었던 수출액을 18년 후에 155억불로, 90불 정도의 국민소득을 1300불로 발전시킨 그 사실을 우리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 누구나 안된다고 했건만, 기어코 완성시킨 경부고속도로. 그것을 시작으로 전국을 하루의 생활권으로 만든 국토의 대동맥은 모두 당신의 강인한 의지의 소산이라고 하겠읍니다.

─ 당신은 분명히 우리의 민족사적 전환점을 마련하신 역사의 점화자였읍니다.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떳떳이 잘살아보자는 불굴의 의지와 집념 그리고 후손들에게 보람찬 유산을 물려주어야겠다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땀흘려 일하고 또 일했읍니다.

─ 푸른 국토, 기름진 강산을 만들어 더 잘 사는 나라로 가꾸기 위해 당신의 발걸음은 멎지 않았읍니다.

─ 당신께서 가시던 날 1979년 10월 26일. 이날도 당신은 바다를 막아 농토를 얻는 거대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서 국토의 개발은 곧 무한한 자원이며 국력의 원천임을 명심하고, 국토 애호정신을 더욱 더 높여가자고 강조했읍니다.

─ 그날 밤의 비운도 모르고 십리 남짓한 방조제를 걸으면서 이 큰 역사의 준공을 흐뭇해했읍니다.

─ 이제 나라와 겨레만을 생각하던 62년의 생애가 그 나래를 접었읍니다.

(중략)

─ 7인 3조로 된 3군 의장대의 조총 발사로 영결식을 마쳤읍니다.


입관식

─ 고 박정희 대통령의 유해를 모신 영구차는 중앙청을 출발했읍니다.

(중략)

─ 고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에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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