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재 전설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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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 전설과 역사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와 백운면 평동리 사이에 있는 고개


(1) 박달재 전설
제천시 봉양면과 백운면을 갈라놓은 험한 산이 박달재라.


조선조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朴達)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이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다.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청초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그날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도 역시 잠을 못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았다.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새 가까워졌다.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더 묵었다.


밤마다 두사람은 만났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싸리문 앞을 떠나지 앉았다.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詩)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科場)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박달은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내 보내고는 날마다 서낭에서 빌었다.


박달의 장원급제를, 그러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사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왔다.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박달은 땅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금봉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은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 안았으나 박달은 천길 낭떨어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의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2) 박달재의 역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천군 산천조에 [“박달산은 현에서 서쪽으로 35리에 있다.”라는 명산은 같은 책 역원조에 “박달원은 박달현 밑에 있다.”라고 하였다.


그 유래는 ‘동문선’에 이제현의 ‘김평장행군기’ 중에, “고종 4년(1217) 맥곡(麥谷)에서 모여 적과 싸워 적 3백여 명을 베거나 생포하였으며 제주(堤州)의 냇가로 육박하니, 시체가 냇물을 덮고 가득히 떠내려갔다.


산골짜기를 수색하여 노약자들을 찾아내어 충주로 보내고, 소ㆍ말과 노획한 것을 가지고 박달현(朴達峴)에 이르렀다.


최공이 말하기를, “고갯마루는 대군이 멈출 곳이 아니다.”하면서 산 아래로 물러나 주둔하려 하였는데 공(김취려)이 말하기를, “전쟁하는 법이 인화(人和)를 중요시한다고 할지라도,


지리(地利)도 더욱 경시(輕視)해서는 안되오. 적이 만일 먼저 이 고개를 차지하고 우리가 그 아래에 있게 된다면 원숭이의 빠른 재주로도 지나갈 수 없을 터인데, 하물며 사람이 어찌 하겠소?”하며


가발병(加發兵)과 함께 고개에 올라서 유숙하였다. 밝을녘에 적이 과연 대군을 고개 남쪽으로 진출시키고, 먼저 수만 명 군사를 나누어 좌ㆍ우쪽 산봉우리로 올라가서 요해처(要害處)를 먼저 차지하려고 하였다.


공(김취려)은 장군 신덕위(申德威)와 이극인(李克仁)으로 왼쪽을 맡게 하고, 최준문(崔俊文)과 주공예(周公裔)로 오른쪽을 맡게 하고, 공은 가운데에서 북을 치며 나가니, 군사들이 모두 죽기로 싸웠으며 3군도 바라보고 크게 외치며 다투어 올라오니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라는


박달현은 김취려 장군이 고갯마루의 요새를 이용하여 거란군을 격퇴시킨 전적지이다.


‘고려사절요’에, “고종 45년(1258)에 충주 별초가 박달현(朴達峴)에 복병을 설치하고 몽고 군사를 기습하여 포로와 우마와 병기를 빼앗았다.”라는 박달현은 몽고군을 격퇴시킨 전적지이다.


박달산에서 연원한 경성대로의 고갯마루는 박달현은 고려시대 거란군과 몽고군을 격퇴시킨 전적지는 조선시대 경도대로의 박달재 정상에는 성황당이 있었다.

반야월 선생이 작사한 ‘울고 넘는 박달재’ 2절에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에 금봉이야”라는 인명이 등장한다.


반야월 선생은 남대문악극단을 창설하여 공연차 지방으로 순회하던 도중에 단원들과 같이 충주행 버스를 타고 비내리는 박달재를 넘던 중에 고개마루에서 버스가 고장이 나서 쉬게되었는데,


성황당 앞에서 어떤 농촌 부부의 애절한 이별 장면을 보고 가사를 지었다는 것이며 후에 김교성이 작곡한 것을 박재홍이 불러 한때 대유행하였다.


[참고자료]
◦제천시,《제천전설》
◦한국고전종합DB,《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
◦한국고전종합DB,《국역동문선》
◦한국고전종합DB,《국역고려사절요》
◦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가요반세기》(1967)

박달재의 유래는 1217년 김취려 장군이 박달현(朴達峴)에서 거란군을 격퇴한 지명이 처음으로 보인다.



박달산에서 연원한 박달현(朴達峴)은 고개 현(峴)자가 우리말로 순화되면서 박달재가 되었다.


반야월 선생이 작사한 ‘울고 넘는 박달재’의 가사에서 금봉이의 인명이 등장하면서 전설이 정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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