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조)
박석틔를 올라서서 좌우를 바라보니, 산도 보든 산이요, 물도 보든 물이다마는, 물이야 그 물이 있겠느냐 광한루야 잘 있드냐, 오작교도 무사허냐? 동림 숲을 바라보니, 춘향과 나와 둘이 서로 꼭 붙들고 가느니 못 가느니 우든 곳이요, 선운사 종성소리 예 듣던 소리로구나. 북문 안을 들어서니 일락서산으 황혼이 되야 집집마두 밥을 짓노라 저녁 연기가 자욱허여 분별헐 길이 전혀 없구나. 한곳을 당도허니, 서리역졸이 모아섰다 문안허거날 어사또 분부허시되, 명일사 거행을 여차허고, 관장일일사 분부허시고, 춘향집을 찾어가 문전으 들어서 동정을 보니, 이때야 춘향어모는 후원으 단을 뭇고 두손 합장 무릎을 끓고 앉어, 비나니다 천지지신 일월성신 화위동심을 허옵시오.
진양조 장단이지만 듣는 이는 시원한 감을 주는 장면이다.
정정렬(丁貞烈, 1876-1938)
정정렬은 전북 익산군 망성면(현재 전북 익산시 망성면)에서 태어나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으로, 이른바 근대 오명창에 속하는 인물이다.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 명고 정원섭(丁元燮, 1878-?)의 형이다. 판소리 명창 정창업(丁昌業, 1847-1889)의 가계와도 관련이 있는 듯하나, 아직 그의 호적이 발견되지 않아 자세한 내력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음악에 소질이 있음을 알아본 부모의 권유에 따라 7세(1882)부터 정창업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10세(혹은 14세)부터 이날치(李捺致, 1820-1892)에게 소리를 학습했으나, 스승의 이른 작고로 16세부터 40세를 전후한 시기까지 익산의 미륵산 심곡사, 부여의 만수산 무량사, 공주의 계룡산 갑사 등지를 떠돌면서 오랜 기간 독공했다. 김초향(金楚香, 1900-1983), 김여란(金如蘭, 1906-1983), 김연수(金演洙, 1907-1974), 박록주(朴綠珠, 1909-1979), 이기권(李起權), 조진영(趙進榮), 조상선(趙相鮮, 1909-?), 박동진(朴東鎭, 1916-2003), 김소희(金素姬, 1917-1995), 강도근(姜道根, 1918-1996), 한승호(韓承鎬, 1924-2010), 최난수(崔欄洙, 1931-2013), 최승희(崔承希, 1937- ) 등이 그의 제자이다.
정정렬은 18세에 과거급제자의 유가(遊街) 및 문희연에 금의화동(錦衣花童)으로 참여할 만큼 실력이 뛰어났다. 이영민(李榮珉, 1881-1962)의 『벽소시고(碧笑詩稿)』 중 "어려서부터 소리 명성 온 나라에 자자해(年少才名一國聞), 예원의 여러 소리꾼들 구름처럼 모였구나(藝園弟子集如雲). 세간의 날고 뛰는 무리라 하더라도(世間虎逐龍拿輩), 봄바람 다스리기는 그대에게 못미치네(管領春風不可及)"라는 시를 통해서도 정정렬이 어린 시절부터 소리를 잘해 인기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28세에 참봉 벼슬을 받았으며, 마산, 경주, 군산 등지에서 수년간 소리선생을 했다. 50세를 전후해 상경했고, 8년간 경성방송국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를 주로 불렀다.
55세부터 단가 〈강상풍월〉(Victor 49139-A 短歌 江上風月(강상풍월) 丁貞烈 鼓韓成俊)과 〈적벽부〉(Columbia 40383-A·B 新短歌 赤壁賦(上)·(下) 丁貞烈 鼓韓成俊), 〈춘향가〉 중 '춘향방 경치'(Victor 49139-B 春香傳 春香家景致(춘향가경치) 丁貞烈 鼓韓成俊)와 '기생점고'(Columbia 40218-B 春香傳 妓生點考 丁貞烈), '이별가'(Columbia 40372-A·B 春香傳 春香離別前(上)·(下) 丁貞烈 鼓韓成俊), 〈숙영낭자전〉 중 '약 구하러 가는 대목'(Columbia 40562-A·B 淑英娘子傳 藥求하러가는데(上)·(下) 丁貞烈 鼓韓成俊), 〈옥루몽〉 중 '강남홍을 만나다'(Columbia 40485-A·B 玉樓夢 江南紅을만나다(上)·(下) 丁貞烈 鼓韓成俊) 등을 유성기 음반으로 남겼다.
또 60세에 『폴리돌 심청전 전집』과 『폴리돌 화용도 전집』, 62세에 『빅타 춘향전 전집』과 『오케 춘향전 전집』 창극 음반 녹음에 참여했다. 55세에 조선음률협회, 56세에 조선성악연구회 설립에 참여했는데, 〈춘향전〉, 〈심청전〉, 〈숙영낭자전〉, 〈별주부전〉, 〈배비장전〉, 〈옹고집전〉 등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창극으로 공연된 작품 대부분은 정정렬의 기획·연출이나 작곡을 거친 것이었다. 당시 창극 공연계는 단순한 분창(分唱) 양식이 주류를 이루는 수준이었으나, 그는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양식을 정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창극사』 「정정렬」 조에서는 정정렬을 서편제 명창으로 분류했다. 목이 탁하고 성량이 부족한 떡목을 타고났으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수련해 대명창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엇붙임이라 하는 장단의 기교를 극단까지 추구했으며, 소리를 평평하게 내지 않고 흔들면서 중간에 음색을 다양하게 바꾸는 창법을 구사했다. 강건한 상청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중하성이 넉넉하고 수리성을 지녔기에 소리의 질감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춘향가〉를 장기로 삼았으며, 그 중 '신연맞이 대목'이 그의 대표적인 더늠이다. '이별가', '십장가', '옥중가'도 그가 새롭게 짠 대목이라 한다. 〈심청가〉와 〈적벽가〉도 잘 불렀으며, 그가 작곡한 〈숙영낭자전〉은 박록주-박송희(朴松熙, 1927- )를 통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성과는 정정렬제 〈춘향가〉의 정립이라 할 수 있다. 정정렬은 익산 지역에 전승되던 집안 소리인 중고제 〈춘향가〉에 김세종(金世宗) 바디의 새로운 소리를 수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춘향가〉를 짰다.
춘향이와 이도령이 편지를 주고받는 장면, 첫날밤을 춘향모 몰래 보내는 장면, 이별할 때 오리정에 나가 대로변에서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이별하는 장면 등은 정정렬 바디 〈춘향가〉의 특징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소리의 음악성은 물론 작품의 극적 구성, 사설의 표현에도 많은 공을 들인 정정렬제 〈춘향가〉는 대표적인 신제 〈춘향가〉로 자리매김했으며, 이로부터 "정정렬 나고 춘향가 다시 났다", "정정렬이 판을 막아버렸다"라는 말이 있게 되었다. 김여란-최승희를 통해 전해진 그의 〈춘향가〉는 여타의 〈춘향가〉에도 큰 영향을 미치면서 현대 〈춘향가〉 전승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정정렬 [丁貞烈] (한국전통연희사전, 2014. 12. 15., 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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