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방송(fm 106.9)사장 부인 트루디 여사(6.25이후 한국을 내조한 여인) 전도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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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방송(fm 106.9)사장 부인 트루디 여사
(6.25이후 한국을 내조한 여인) 전도지 소개

“트루디, 나는 특별한 목적을 갖고 너를 한국으로 보냈다. 네가 조금만 참고 견디면 너는 한국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 거야 ”

오늘은 버스킹을 대신하여 어제부터 오늘까지 명함전도지 배포를 통해 전도를 하였습니다. 오늘은 특히 투루디 여사의 내조와 짧은 간증을 알리고자 합니다. 저는 7년 전쯤 극동방송에서 이 전도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냥 배포하기에 모하고 게으른 탓일까요 이렇게 오랫동안 미루다가 오늘 제 명함 전도지와 함께 배포하기 시작했습니다. 7년간 많이 이사를 하였지만 잃지 않고 지금도 제 머리 옆에 지금도 보관하였던 것은 이것을 받을 때 극동방송 전도지 담당 소속 어느 권사님의 기도와 함께 이 전도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은 전도지를 가볍게 잃어 버리는 망령된 일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더 이 전도지가 가치 있기를 원하기에 여기에 있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일이 담겨 있고 이 전도지를 나누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 여기기에 배포만 끝나는 것이 아닌 이 간증을 나눕니다. 부디 6.25 전쟁 후 이 황무지와 같은 곳에서 김장환 목사를 내조하며 한국을 후원한 여인의 간증을 통해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초가집 황무지 한국에서 복음 터를 가꾸는 남편을 지극히 내조한 미국 트루디 여사의 간증을 나누어 봅시다.

그녀의 모습은 한국을 내조한 여인이라 여겨집니다. 일본과 북한의 침략에서 한국을 구원하고 이후 한국을 끝까지 인내하며 내조한 미국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아닐까요...


1959년 11월, 나는 나의 고향 미국에서 머나면 타국인 한국으로 가기 위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메이든 크리크라는 화물선을 탔다. 오로지 한국인 남편과 함께...

17일 간의 긴 항해 끝에 1959년 12월 12일 밤 8시 부산에 도착했다.
야경이 아름다웠다. 샌프란시스코와 너무 닮아 있어서 부산도 그처럼 좋은 집이 많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배에서 자고 아침에 갑판에 나왔을 때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아름답던 불빛은 알고 보니 수많은 오두막집에서 나온 것이었고, 산은 황폐하기만 해 모든 것이 신기하고 낯설었다.

다음날, 우리가 탄 배는 인천 앞바다에 도착했다. 당시 썰물 때라서 작은 배로 옮겨 탄 뒤에 갯벌까지 나가 걸어서 부두로 나왔다. 가방을 들고 부두로 걸어 나오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몰려와서 나는 깜짝 놀랐다. 알고보니 30명 정도는 수원에서 온 친척들이고 나머지는 미국 사람을 처움 보는 구경꾼들이었다.
‘아이고 장환아!’
우리가 가까이 가자 주름살 많은 할머니가 남편의 목을 끌어 안았다. 시어머니는 8년 만에 귀국하는 아들을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아들의 모습을 알아보고 달려 나왔다. 그 다음엔 나를 껴안으며 말씀하셨다.
‘네가 장환이 색시냐? 예쁘게도 생겼구나. 꼭 한국 사람같네.’
당시 어머니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나도 한 식구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원 시댁에 도착했을 때 초가집 마당에는 일가 친척과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푸른 눈의 색시가 불편하고 어색한 한복을 처음으로 입고 나오자 누군가 내게 배가 고플거라고 행각했는지 국수를 권했다.
‘여보, 포크는 어디 있어요?’
국수를 처음 본 나는 젓가락 사용법을 몰라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젓가락으로 이렇게 저어서 먹는거요’ 하면서 시범을 보였다. 어렵게 젓가락질을 따라하면서 국수를 집어 올리는데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나왔다.
‘국수에 웬 생선이...’
잔치국수에 들어간 멸치는 마치 살아 헤엄치는 것처럼 보였다. 깜짝 놀라 기겁을 하고 있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그리고 그때 난생 처음 맛본 김치는 신맛 때문에 손도 못 댔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힘들어 할 때에 누군가 나를 위해 센베이라는 과자를 사다줘서 그나마 먹을 거리고 삼을 수 있었다.
‘이렇게 불편한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
잠자리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그럴 때면 내 마음속에서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트루디, 나는 특별한 목적을 갖고 너를 한국으로 보냈다. 네가 조금만 참고 견디면 너는 한국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 거야 ”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난 뒤에는 조용히 혼자 찬송을 불렸다. 그러면 ‘이미 선교사로 각오를 하고 왔으니 불편한 것 쯤은 문제가 아니다’ 라는 의지가 샘 솟았다.

한국에 온 뒤로 계절이 봄으로 바뀌면서 한국말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저녁밥을 먹고나면 시어머니와 맏동서가 나를 데리고 옆집으로 놀러 가곤 했다.
‘이것은 청단이라고 하고, 그림이 이렇게 맞았을 때 점수를 따게 되는 거야’
동네 아주머니들은 툭하면 모여 화투를 쳤다. 나는 맏동서에게 화투하는 법을 배웠다. 시댁 어른 눈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말은 잘 안 통했지만 화투하는 방법을 금방 배웠고, 화투를 하면서 같은 말을 반복하며 한국어도 익힐 수 있었다. 그때 배운 화투의 요령이 지금도 생각나는데, ‘주변을 끊임 없이 살펴라’. ‘작은 점수에 미련을 버려라’부터 ‘열 받으면 진다’는 말도 있었다. 남편은 내가 나중에 방송에서 그 얘기를 할 때까지 내가 화투를 쳤던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난 화투를 한국 전통의 민속 놀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가족들이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화투를 치지 않았지만, 여자들끼리 따뜻한 이불 속에 발을 넣고 삶은 고구마를 나눠 먹던 시절의 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다문화 가정이라는 말이 최근에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데, 우리 가정은 바로 그 다문화 가정의 원조라고 볼 수 있다. 요즘은 국적이나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덜하지만, 예전만 해도 ‘혼혈아’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무척 심했다. 나는 2남 1녀를 한국에서 낳고 키우면서 다른 한국 아이들처럼 당당하게 행동하라고 가르쳤지만, 아이들은 나름대로 알게 모르게 마음 고생 한 적이 많았다.

큰 아들 요셉의 경우엔 늘 외국인 엄마에 대해 이중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집에서는 나를 다정한 어머니로 믿고 따랐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인과 한국인의 외모를 조금씩 닮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 했던 것이다. 가끔 요셉은 ‘사는게 참 힘들어요, 난 도대체 한국 사람이에요? 미국 사람이에요?’ 물었다.
고작 열 살 밖에 안된 아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으니 내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지금은 자랑스런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막내 아들인 요한은 리더십이 좋아 늘 주변에 친구로 가득했다. 요셉과 딸 애설이가 상장과 부상을 여러번 받았지만 요한은 상장을 구경할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여러 방면에 흥미를 갖도록 격려 했다. 어느날 요한이가 학교에서 100m 달리기에서 1등 상장을 받아왔다.
‘엄마 나도 드디어 상장이 생겼어요. 굉장하죠?’
‘그래 우리 요한이도 남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었구나, 엄마는 네가 자랑스러워.’ 하며 요한이를 격려하면서 더 많이 사랑을 주곤 했다. 요한이도 자랑스런 목사가 되었다.

또한 사랑하는 딸 애설이. 애설이는 대학에서 피아노와 종교음악을 전공한 뒤 대학원에서 교육한 석사를 받았다. 결혼한 뒤 미국 최대 교과서 출판사에서 일하다 아기를 가진 뒤로는 아이들에게 단 한번 뿐인 어린시절을 어머니와 보내는 것이 자녀의 성장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 미련 없이 직장을 그만 두고 집에서 피아노 레슨만 했는데...
지금 애설이는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유수의 한 대학교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지 일주일 만에 빌리(김장환 목사)와 결혼을 하고 1959년에 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해 지금까지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
하나님은 그동안 한국에서 나를 미스 트루디에서 아내 트루디로, 선교사 트루디로, 사모 트루디로, 엄마 트루디로, 교육자 트루디로, 파이샵 트루디로 만드시고 쓰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멋진 인생을 살게 해주고 계신다. 이는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됐기에 가능한 삶이다.
당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나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기도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장 12절)

=당신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중대한 결정에 도움이 필요하신 분은 언제나 가까운 교회를 방문하거나 극동방송을 청취하거나, 전화 서울 (02) 320-0114로 연락 주십시오. 자세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생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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