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동송읍 상노1길 58 (상노리 72-1) 에 위치한 보개산 심원사는, 개성에서 동(東)으로 180리 되는곳에 산이 있의 보개라.
영봉들이 열지어 솟아있고, 숲은 우거지고 물은 깊은데, 산의 중앙에 하나의 기이한 봉이 높다라니 홀로 앉아있으니 '환희봉' 이라 봉의 남쪽 3리 되는 곳의 아래 암자가 하나 있으니 '석대암' 이라 한다. 석대암은 1,300여년 전 (서기 720) 사냥꾼 이순석, 순득(李順碩, 順得) 형제가 한마리의 커다란 멧돼지를 발견하여 활로 쏘았는데, 금 빛 멧돼지는 붉은 피를 흘리며 달아났고, 그 핏자욱을 따라가니 환희봉쪽 이었다. 형제가 그 흔적을 추적하여 멈춘곳에 멧돼지는 보이지 않고, 지금의 지장보살상이 있었는데, 석상은 우물 가운데서 상반신만 물위에 나와있고, 하반신은 물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좌측 어깨 중앙에 순석등이 쏜 화살이 꽃혀 있는지라 두사람은 크게 놀라 석상의 팔에서 화살을 뽑으려 하나 화살은 뽑히지 않고, 석상(石像)은 태산과 같은 무게로 움직이지 않으므로, 형제는 놀라서 선채 맹세하기를 "대성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십시요. 우리를 속세의 죄업에서 구제해주시려고 몸을 나투신 것임을 알겠나이다. 내일 우물곁에 있는 돌위에 나와 주시면 저희들은 뜻에 따라 출가수도 하겠습니다." 다음날 그 곳에 와보니 석상이 돌위에 나와있는 고로 출가하여 석상이 나투신 옆에 암자를 창건하니 석대암(石臺庵)이다. 석상이 나투신 옆에 암자를 창건하니 석대암(石臺庵)이다.
지금도 옛 석대암터 옆에 우물이 있으며, 염험비가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렵다. 대덕 11년 정미 8월 성수 조얼대부 한림학자, 삼중대광 정교첨 의정승 무문과 대제학감, 춘추관사 여흥군 무헌자 헙희거사 민지記. 원정우(인종의 연호)7년 경신 8월 돌에새겨 세우다.
또한 근세의 율사였던 남호, 영기스님의 법명은 영기, 법호는 남호(南湖) 이셨는데, 조선 순조21년(서기 1820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아버지 정언규 어머니 변씨 사이에서 출생하셨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문둥병이 심하여 걸식을 하며 돌아다니다 13세때 문둥이 떼거리와 같이 심원사에 오게 되었는데, 대연스님께서 불쌍히 여기고 "석대암 지장보살님께 지극정성 기도하면 네 병이 치유케 되리라" 고 하셨다. 소년은 이말을 듣고 매일 지장보살님께 지성으로 기도하여 병이 치유되자 출가하여 불경, 계행, 경학(佛經, 戒行, 經學)을 닦아 율사로써 이름을 떨치게 된바, 33세때 자신의 몸을 찔러 그 피를 먹물에 섞어 아미타경을 서사하셨고, 삼각산에서 미타경을 목판에 새기고 16관경(16觀經)과 연종보감(蓮宗寶鑑)을 판각, 지금의 남양주군 흥국사에 봉안하고, 1854년 화엄경 판각을 위해 석대암 지장보살님전에 100일 기도후, 1855년 봉은사에서 소초화음 80권과 보현행원품, 별행 1권, 준제천수합벽(準提千手合壁) 천태지은(之隐) 시집등을 판각, 판전 법당을 신축 봉안하고 1872년 석대암 및 심원사에서 주석하시다 입적하시니 세수 53세요 법랍 39세였다.
지금 봉은사에는 율사님의 공적비가 남아있다. 이처럼 영험스럽고 중생을 죄업에서 구제키 위해 몸소 나투셨다 하여 생지장(生地藏)도량 이라 한다.
1934년 한규설 대감의 부인 박기우(선심화), 박기석(대선화) 자매는 대감이 죽은 후 왕생극락을 빌고자 이 화웅스님을 기도법사로 모시고 100일 기도를 입제하여 지극정성 기도를 한 후 회향 3일을 앞둔 날 밤 9시경 지장보살님이 팔에서 방광(放光)하시는 가피를 얻어 당시 심원사 주지 이춘산(李春山) 스님과 의논하여 불교 강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충청도에 있는 7만여평의 논을 팔아 심원사에 시주하여 강원이 설립되니 그 이름이 "화산강원" 이였다.
심원사에서는 이 두 자매의 공덕을 기려 부도장에 1936년 공덕비를 세워 지금도 그 공덕비가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요즈음도 지장보살님의 가피를 입어 불치의 병이 낫거나 집안의 모든 우환이 없어지는 가피를 입은 불제자가 비일 비재하다. (자료제공 ; 심원사 / Data provided by Simwo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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