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덕이슈 오늘 l 53 여성독립운동가들 2. 김마리아, 여성항일독립투쟁의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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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리아] 여성항일독립투쟁의 표상

1919년 3월 1일, 민족 해방의 염원으로 전국이 들끓었습니다. 삼일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은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습니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마리아는 동경유학생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들여오기 위해 평생 한 번도 입지 않던 기모노를 입었습니다.

독립운동의 명가라 할 만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마리아가 독립운동에 발을 들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여학교 시절 서울의 숙부 집에 살았는데, 그 숙부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 7인의 의사 중 한 사람이자 독립투사인 김필순이었습니다. 김필순의 동생들로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순애와 김필례는 그녀에게 고모이고, 독립투사 김규식은 고모부였습니다. 김마리아가 숙부 김필순의 집에 살던 시절, 김필순 형제가 운영하던 ‘김형제상회’는 신민회 연락본부이자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이 무시로 드나들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잔심부름을 도와주기도 하던 소녀가 바로 김마리아였습니다.

기모노 속에 숨겨 들여온 독립선언서를 전국에 배포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김마리아는 일제 경찰에 체포됩니다. 수감된 김마리아에게는 잔혹한 고문이 이어졌습니다. 고문으로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출옥 후 그녀는 몸도 추스르지 않은 채 다시 활동에 나섭니다.

본인이 회장으로 있던 애국부인회를 전국적 조직으로 재편한 것은 다가올 전면적 항일투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마련해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다시 일제에 체포된 김마리아. 계속된 끔찍한 고문으로 그녀는 평생 회복되지 않는 고통 속에 살게 됩니다. 병보석으로 출옥한 그녀는 비밀리에 중국 망명길에 오릅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그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을 재개합니다.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는 수많은 민족지도자와 지사들이 일제와 손을 잡던 변절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교육자가 되어 돌아온 김마리아는 그런 시대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신사참배 거부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여성도 독립을 위해, 일제라는 불의에 맞서기 위해 앞장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김마리아는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달고 살아야했던, 뼈에 고름이 차는 고통보다 나라를 잃은 고통에 더 아파했습니다. 대한의 독립과 결혼한 채, 일생을 독립 운동에 헌신한 김마리아. 그녀는 미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지만,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오직 독립을 염원하며 독립을 위해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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