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한국사 I 049 임오군란과 흥선대원군의 재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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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난다. 강력한 신식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의해 조선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고종은 외세의 침략에 맞설 군사력 강화를 꿈꾼다. 이에 양반 자제들로 이루어진 신식 군대 별기군을 만들었다. 도시 하층민으로 이뤄진 구식 군대는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았다. 급료가 1년이 넘게 밀리고, 그나마도 썩은 쌀을 받기도 했다. 구식 군인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고, 급기야 1882년(임오년) 6월, 반란을 일으킨다. 고종의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도 임오군란에 동조했다. 봉기를 일으킨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원했고, 결국 고종은 대원군에게 사태수습을 부탁한다. 9년 만에 정치 전면에 다시 나선 흥선대원군은 무위영, 장어영, 별기군을 폐지하고 5군영을 다시 설치한다. 또 당시 국정 핵심기구였던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는 등 고종의 주요 개화정책을 원점으로 돌렸다. 하지만 33일 만에 대원군이 청에 납치된다. 그가 재집권해 서양세력을 배척하면 일본이 득세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청으로 강제 압송당한 흥선대원군은 이국땅에 유폐된 채 3년간 조선 땅을 밟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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