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한개마을 星州 大浦村 국가 민속문화재(255호) 성주 한개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민속 마을이다. 한개마을은 뒤쪽에 있는 영취산이 마을을 감싸주고, 앞으로는 두 개의 하천이 합하여 홀러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길지에 있다. '한개'라는 마을의 이름은 순수 우리말로, '큰 개울'을 뜻한다. '한'은 크고 넓다[대(大)]는 의미이고, '개'는 큰물이 드나드는 곳[포(浦)]을 나타낸 말이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하천에 제방을 쌓기 이전, 큰물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뒤'큰 개울'이 생기면서 '한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에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李友)가 1450년 무렵 마을에 들어온 이후 성산이씨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이정현이 문과에 급제한 이후 33명이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에 걸쳐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마을로 널리 알려졌다. 이원조, 이진상 등의 이름난 유학자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승희 등이 있다. 마을이 번성하였을 때는 100여 채가 넘는 집이 있었으나, 현재는 60여 채가 남아 있는데, 대부분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세워졌다. 그 중 교리댁, 응와종택, 한주종택, 월곡댁, 진사댁, 도동댁, 하회댁, 극와고택, 첨경재가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마을의 집들은 지붕, 대청마루, 부엌, 툇마루 등 거의 다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성주 지역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옛날에 사용하던 살림 도구와 의복 및 생활용품 등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성주 대산리 진사댁 星州 大山里 進士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안채에는 상량문*이 있어 조선 정조 22년(1798) 이주진 또는 조선 철종 9년(1858) 이문상이 처음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이국희가 살림을 내면서 이 집을 샀고, 그가 1894년 조선 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있었던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면서 진사댁으로 불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예안댁으로 불리었는데 이는 이문상의 부인이 안동 예안에서 시집을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채, 사랑채, 새사랑채, 화장실 등 모두 4동인데 'ㅡ'자 모양의 안채와 사랑채, 'ㄱ'자 모양의 새사랑채가 '튼 ㄷ '자 모양을 하고 있다. 새사랑채는 앞쪽에 난간을 세우고 누마루처럼 꾸민 마루 1칸과 온돌방 1칸, 창고 등으로 이루어졌다. 누마루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권자 장식으로 멋을 내었다. *상량문(上樑文): 집을 새로 짓거나 고친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문서
성주 응와종택 星州 凝窩宗宅 지정별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4호 소재지 :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23-16 섬주 음와좀백은 한개마읍 성신이씨의 발상지이다. 성산이씨가 한개에 입향할 당시의 종택이었던 대초당 (大草堂)을 경종 1년(1721)에 처사 이이신(李爾紳)이 매입하여 응와종택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이이신의 아들 돈재(遯齋) 이석문(李碩文)이 북쪽으로 문을 내어 북비고택(北扉古宅)으로도 불린다. 돈재의 아들 사미당 (四美堂) 이민겸(李敏謙)이 규모를 확장하였고, 사미당의 아들 농서!農棲) 이규진(李奎鎭)이 순조. 21년(1821)에 정침을 신축하였으며, 농서의 아를 응와(凝高) 이원조(李源祚)가 현종 11년(1845)에 사랑채인 사미당을 낙성 하여 현재의 규모를 이루었다. 고종 36년(1899)에 솟을대문을 증축하며 대감댁의 면모를 갖추었고, 순종 4년 (1910)에 사당을 증축하였다. 돈재는 무신으로서 사도세자에게 충의를 다하였고 농서는 알성문과에 장원급제 하여 은율현감을 지냈다. 응와는 한성판윤 · 공조판서 · 판의금부사를 지낸 문신이며. 조선 주리학(主理學)의 학통선상에 있는 학자이다. 홍절과 학문을 면면히 이어 온 이 가옥은 안채 · 사랑채 안사랑채 사당 . 북비채 · 대믄채 등 6채로 구성되어 있고, 북비채에 있었던 장판각과 안대문채 아랫채 등은 남이 있지 않다. 소실된 안대문채는 중문간채 · 방앗간 · 고방 등으로 이루어진 6칸으로 안채 맞은편 남쪽에 있었으며, 아랫채는 안채의 동쪽에 지금의 안.나랑체와 마주 보며 있었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이승희 생가 소재지 관리번호 30-1-69 이태용 Lee Tae Yong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43 43, Hangae2-gil, Wolfisng-myeon, Seongju gun,Gyeongsingbuk-do 한말 구국운동과 1910년대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에 헌신했던 독립운동가 이승희가 태어나 살던 곳이다. 이승희(李承熙, 1847~1916)는 1905년 을사조약이 강 · 제되자 경상도 유림의 뜻을 모아 '을사5적'의 참형과 조 약의 파기를 상소하였다. 이 일로 5개월 여의 옥고를 치 렀다. 1907년 성주군의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으며, 헤 이그 만국평화회의와 세계 각국 정부에 서한을 보내 국 권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1908년 5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이상 설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고, 1909년부터 북간도 밀산부에서 독립운동기지 한흥동 건설을 이끌었 다. 1913년 서간도로 옮겨 독립운동기지 덕흥보를 건설 하는 한편, 동삼성 한인 공교회를 창립하여 한인의 정신 적 결속을 다졌다
대산동 한주종택 大山洞 寒洲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N 안 채 사 당 한주정사 곳간채 아래채 관리사 중문채 사랑채 대문채1 대문채2 15 한주종택은 영조 43년(1 767)에 이민검이 처음 지었고, 고종 3년(1866) 이진상이 고쳐 지었다. 1910년 이승희가 아버지인 한주(寒州) 이진상의 호를 딴 한주정사(寒洲精舍)를 지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그의 호를 따서 한주종택이라고 불렀다. 또 지금 소유자의 할머니가 상주 동곽에서 시집을 왔다고 하여 '동곽댁'이라고도 부른다. 이진상의 아들이면서 제자인 이승희와 손자 이기원, 이기인은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빼앗는 데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삼부자 모두 그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받았다. 안채, 사랑채, 아래채, 곳간채, 중문채, 대문채, 사당, 한주정사, 관리사 등 모두 11동으로 이루어졌다. 가옥은 한주정사가 있는 구역과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구역으로 나누어졌으며, 한개마을의 다른 가옥들에 비해서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안채가 '튼 ㅁ'자 모양으로 배치된 점 등은 한개마을 집들의 공통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성주 대산리 도동댁 星州 大山里 道東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안채 사랑채 곳간채 중문채 도동댁은 이원조의 둘째 아들인 이기상이 응와종택에서 분가하여 1850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동댁이라는 이름은 현재 소유자의 어머니가 도동서원이 있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마을에서 시집을 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동댁을 처음 지은 이기상은 사촌 형 이진상을 따라 학문을 익혔으며 조선 철종 6년(1855)에 과거에 합격한 후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를 지냈다. 이 집은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곳간채 등 모두 4동으로 이루어졌다. 오른쪽으로 난 입구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가 남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으며, 사랑채의 왼쪽에는 안채가 있다. 안채 앞쪽으로 중문채가 있고, 안채 앞에 있는 안마당 왼쪽에는 곳간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튼 ㅁ '자 모양이다. * 통례원 인의: 통례원은 조선시대 관리들의 회의인 조회(朝會)와 의례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인의는 통례원의 관리로서 종6품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성주 극와고택 星州 極窩古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안채 화장실 사랑채 극와고택은 사랑채에 적힌 상량문*을 보면 철종 3년(1852)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극와고택이란 이름은 이 집의 주인이었던 이주희의 호'극와(極窩)'에서 따왔다. 이주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흰옷과 흰 갓을 쓰고 생활하였다. 또한 그는 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이를 한탄하며 방에 거적을 깔고 생활하였다. 안채, 사랑채, 곳간채. 화장실의 4동으로 이루어졌으나, 곳간채는 없어지고 지금은 3동만 남았다. 극와고택의 안채는 기와집이고, 사랑채는 초가집임에도 불구하고 평면구성이 기와집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 양반 가옥으로 손색이 없다. 처음 집을 지었을 때는 안마당의 동쪽에 곳간채가 있어 사랑채와 더불어 전체적으로 'ㄷ'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현재는 곳간채가 철거되고 모양의 사랑채와 안채만 남아 '二'의 모양이 되었다. *상량문(上樑文): 집을 새로 짓거나 고친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문서
성주 대산리 하회댁 星州 大山里 河回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N 부속채 안 채 사랑채 곳간채 화장실 대문채 중문채 15 하회댁은 지금 소유자의 어머니가 안동 하회마을에서 시집을 왔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하회댁을 언제 세웠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7세기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한개마을의 다른 집들처럼 남부 지역 양반가의 특성을 잘 유지하고 있다. 비록 부분적으로 고친 곳도 있으나 본래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안채, 사랑채, 대문채, 중문채, 곳간채, 부속채 등 모두 6동으로 이루어졌다. 집의 배치는 'ㄷ' 모양 안채를 중심으로, 앞쪽에 - 모양 중문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튼 ㅁ' · 모양이다. 안채 오른쪽에는 독립된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돌과 흙으로 된 담장으로 구분되며 그 사이에 좁은 문을 내어 출입하게 되어 있다. 현재 이 집에 들어가려면 대문채를 통과하여 사랑채 앞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야 하는데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처음 지었을 때의 출입문은 중문채 앞쪽에 있어 사랑채 앞을 통과하지 않고 직접 중문을 통하여 안채를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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