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한국사 I 105 을사늑약 강제 체결 당일 시간대별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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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0일, 이토 히로부미가 일왕의 특사로 고종을 만나 동양평화를 위해 일본 대사의 지위를 받으라는 일왕의 친서를 전달하지만 고종은 이를 거듭 거부한다. 이토는 손탁호텔로 대신들을 불러 조약 체결을 회유하지만 역시 실패한다. 그러자 일본은 당시 한국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덕수궁 주변으로 배치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1905년 11월 17일 오전 11시, 이토는 고종의 밀사 헐버트가 미국에 도착하기 전에 조약을 체결하려고 서두른다. 대한제국의관료들이 일본 측의 요구를 거부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토 히로부미는 17일 저녁 8시 일본군을 앞세우고 회의당 안까지 들어간다. 직접 회의를 주재한 이토는 고종이 관료들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는 말로 참석자들을 회유한다. 그리고 조약 체결을 다수결로 하겠다며 개개인에게 찬반 의사를 묻는다. 이토의 계속되는 회유와 협박에도 참정대신 한규설을 비롯, 민영기와 이하영은 끝까지 반대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강압의 분위기가 고조됐고 이완용이 처음으로 찬성의 뜻을 내비친다. 이완용의 조약 체결 불가피론에 이지용과 이근택이 동조한다. 17일 밤 11시, 울분을 참지 못한 한규설이 이런 사태를 고종에게 보고하려다 궁궐 구석방에 감금되고 만다. 한규설이 돌아오지 않자 대신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결국 권중현이 조약문 수정을 전제로, 박제순이 황제의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애매한 발언으로 찬성한다. 을사늑약은 18일 새벽 1시에 체결됐다. 이 과정도 의문투성이다. 조약문에는 반드시 찍혀야 할 국새 대신 일본이 야밤에 훔쳐온 외부대신 박제순의 도장만이 찍혔다. 그럼에도 이 종이 한 장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가 공식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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