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스페셜– 가봉의 봉고 대통령 그는 왜 한국 최고의 귀빈 되었나 / KBS 2003.6.7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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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7월, 아프리카 가봉 대통령의 국빈 방한
오마르 봉고 가봉대통령의 방한은 각료급 7명을 포함한 총 수행원 70여 명의 대규모 방한이었다. 봉고대통령의 방한을 기념하는 기념우표, 기념담배가 제작됐고 방한 일정은 연일 일간지 1면 헤드라인을 장식했을 정도로 모든 이목이 집중됐다.
역사스페셜 제작진은 정부기록보존소의 의전일지와 당시 보도내용을 통해 봉고대통령의 3박 4일간의 방한일정을 추적해봤다.

가봉에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던 배경은?
북한이 UN에 가입한 신생독립국들에 대해 적극적인 외교를 펼치면서 월남파병으로 국제적 입지가 좁아진 한국의 외교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이에 한국도 UN 내에서의 입지 확보를 위해 맞대응 외교를 시작한다. 특히 신생독립국가 중 드물게 親서방정책을 펼쳤던 가봉은 한국의 對아프리카 외교의 교두보였다.

북미 직접협상을 막아라
1969년 7월 美 닉슨대통령은 아시아 방위문제에서 미국의 역할을 줄인다는 ‘닉슨독트린’을 발표한다. 이 발표 이후 북한의 대미정책은 반미투쟁노선에서 미국과 직접 접촉을 계획하는 정책으로 변화한다. 심지어 미국 내 친북세력을 키우고 주한미군철수과 한미관계 이간을 꾀하기에 이른다. 미국과의 접촉을 위해 북한이 선택한 접속채널 중 하나가 바로 가봉 등 비동맹국을 통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가봉외교는 북한의 외교정책에 대한 견제책이었던 것이다.
역사스페셜 제작진은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봉고대통령이 북한방문시 미국에 전달해달라고 요청받은 김일성의 친서를 공개한다.

소모적 남북 외교대결의 전환점, 30차 UN총회
1970년대, 유엔에서의 남북외교대결이 절정에 치닫는다.
한국정부는 23개국에 달하는 아프리카 수교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매년 10만 달러가 넘는돈을 무상지원했고, 북한도 1975년 한해에만 무려 4천 8백만달러에 달하는 돈을 지출했다.
그러나 이런 남북대결구도는 서로가 표방하듯 평화를 위한 노력이 아닌, 서로 갈등의 골만 깊게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이런 출혈적 남북외교대결은 1975년 제30차 UN총회에서 남북한 결의안이 모두 통과된 이후 수그러들게 된다.

역사스페셜 199회– 가봉의 봉고대통령, 그는 왜 한국 최고의 귀빈 되었나
(2003.6.7.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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