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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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만에 반가운 사람이 왔습니다. 네째 외숙모 그리고 큰 외삼촌의 큰 딸인 사촌 여동생입니다. #반가움 과 #그리움 을 함께 하며 영상을 기록합니다.
● 어린 시절
1953년 2월에 농촌에서 태어났고 '원평장터' 시장 통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원평장터'에서 쌀가게를 하셨고 논농사를 제법 지셨다. 아버지는 사각모자를 쓰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24살 학생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2살 어린 22살짜리 원평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아버지를 잘 아는 초등학교 교감선생님이 중매하여 결혼을 했다.

외갓집은 학자 집안이었다. 농사일은 물론 장사해본 경험이 없는 학자 집안 따님이 돈이 좀 있는 쌀가게 큰 며느리로 시집을 온 것이다.

어머니가 생각하는 시댁을 상상해본다. 남편은 철부지 학생이었으며,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동생 3명, 시누이 6명, 머슴 2명 무거운 집안이었다. 방학 때가 되면 시어머니의 승낙 반 거절 반으로 남편을 찾아 서울로 나섰던 어머니였다.

고모들 성화에 못 이겨 초등학교 입학 2달 만에 국문 해득을 했고, 철없는 부모보다 할머니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남자 어른들은 '쌀과 돈'이 있는 논 두럭과 가게에서 생활하셨지만, 여자 어른들은 큰 손주 큰 조카인 나를 대상으로 학교생활과 공부시키기에 집중하였다.

나는 해방되고 싶었고, 틈만 나면 집 가까이 원평천에서 벌거벗고 물장구치고 소꿉놀이를 즐기다가 늦게 귀가하여 야단맞는 일이 허다했다. 공부시키려는 자와 놀고 싶어 하는 자의 대립 속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가족들 성화에 초등학교 졸업은 '6년 개근상' '6년 우등상'을 받았다. 주위 사람들이 평가하길 공부 잘하고 그림을 잘 그렸다고 했다. 그림을 잘 그렸던 이유는 이웃집 아이 와 놀면서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내가 본 나는 ‘우물 안 개구쟁이’ 였다.

덕분에 중학교는 농촌을 벗어나 도청 소제지인 전주에서 다녔다. 운 좋게 고등학교 3학년 입시 공부 하는 형들이 가득한 집에서 하숙하였다. 형들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밤12시까지 공부하였다.

형들이 없는 낮에는 공부에 대한 여유가 있어 만화를 즐겼다. 하루에 50여 권씩, 숫자로 계산해보니 일주일에 200권 일 년에 2,000권 이상의 만화책을 보았다.

부모 몰래 카메라를 구입하고 사진 찍어 자랑 하는 것을 좋아 했다.

학칙에 크게 어긋난 불량학생은 아니었지만 착실한 모범생도 아니었다. 중학교 졸업 성적은 전교 300명 중 30등 내외 상위 권이였다. 학교에서는 명문 고등학교 전형시험에 합격할 줄 믿었지만 낙방하여 실망시켰다.

후기로 신설된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다. 담배를 피웠고, 여학생 뒤꽁무니를 따라다녔으며, 친구와 싸우고, 미성년자 출입 불가 영화를 보다가 선생님께 들켜 정학 처분까지 받았다.

다행히 첫사랑 순희 생각으로 ‘대학 진학’ 이라는 꿈을 꾸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고등학교 후반기부터 입시 공부에 집중 했다. 순희가 그토록 보고 싶고 친구들과 어우러지는 유혹이 있었지만, 끝까지 노력한 결과 '예비고사'에 합격했다. 버겁게 전북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과에 입학하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대학생활은 '유신정권 반대' 대모가 일상처럼 되었고 삶 중 처음 경찰서 유치장 구경을 하는 경험을 갖었다. ‘유신방학’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있어 다른 길로 빠질 수도 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초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그림을 그리며 안정적 학창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장교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학군단에 입단하여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시간을 ROTC 군사 훈련으로 바꾸게 하였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ROTC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대모에 적극 가담했을 것이고 경찰서 유치장을 자주 다녀 졸업을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학교를 졸업하고 군 생활을 마침과 동시에 한국전력공사에 취업하였다. 회사 생활 중 해마다 활동 내용을 기록하여 남긴 수첩 34권이 있어 책쓰기와 삶에 도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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