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안 관측과 망원경 관측의 한판 대결, 헤벨리우스와 핼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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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안 관측과 망원경 관측의 한판 대결, 헤벨리우스와 핼리의 이야기인데요. 지금부터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고대로부터 유명한 천문 관측자들은 많았지만, 오늘날 최고로 알려져 있는 육안 관측가는 티코 브라헤다. 그리고 그에 못지 않은 육안 천문학자로 헤벨리우스가 있다.
헤벨리우스가 별을 관측하던 당시에는 이미 천체망원경을 관측 도구로 사용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특이하게도 항성의 위치를 측정할 때 망원경이 아닌 육안 관측을 고수했다.
아마도 당시의 부실한 망원경보다 과거부터 내려온 육분의를 이용한 육안 관측을 더 신뢰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가 육안 관측으로도 뛰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 티코 브라헤가 썼던 육분의를 보다 개량해서 사용했기 때문인데, 육분의를 기준별과 관측별 양쪽으로 향할 수 있도록 만들고,
이를 통해 두 사람이 동시에 관측함으로써 오차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별을 관측하던 젊은이로 핼리가 있다. 핼리 역시 항성 위치를 추정해 목록을 만드는 작업에 관심이 있었으나, 그 작업은 이미 헤벨리우스가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핼리는 눈을 남쪽으로 돌렸다. 마젤란 이후 지구 남반부에 지금껏 보지 못하던 별들이 있음이 알려졌고, 그곳의 별은 다른 누구도 관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곧 아프리카 대륙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약 1년 6개월간 머물면서 각종 관측을 행했다.
그 결과 핼리는 남반구의 341개 별의 위치와 밝기에 대한 남천 항성목록과 1677년 일식, 월식에 대한 기록, 그리고 같은 해 수성일면통과 관측 기록까지 얻어낼 수 있었다.
핼리는 남반구에서의 관측 당시, 상당수 기준별 위치를 헤벨리우스의 항성목록에서 참고했다. 그리고 그 사실과 자신의 기록을 헤벨리우스에게 편지로 보내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남반구 관측에서 돌아온 핼리는 헤벨리우스에게로 향했다. 그곳에서 헤벨리우스와 핼리는 2개월 동안 공동 관측을 행하며 관측 정밀도를 비교해보기에 이르렀는데,
헤벨리우스는 육안으로, 핼리는 망원경으로 관측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관측 정밀도에 대해 자신이 있었던 핼리 역시 헤벨리우스의 치밀한 관측 기술에 놀라고 말았다.
헤벨리우스의 기계는 망원경에 못지않은 정밀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육안 관측의 승리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망원경의 성능은 개량되었고 정밀도 역시 향상되었다. 그리하여 헤벨리우스 이후로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육안 관측을 고집하지 않게 되었다.
뛰어난 육안 관측 실력을 보였던 헤벨리우스는 결국 최후의 육안 관측자로 남았습니다. 핼리 역시 그의 육안 관측에 영향을 받기도 하며, 망원경 관측의 새 시대를 열고 과학사에
충분한 공헌을 남겼습니다. 육안이든, 망원경이든 그들의 관측으로 발견된 별들은 지금도 밤하늘에 빛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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