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 ‘저는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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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인터뷰 조용섭(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 "(탄광) 직원들이 도망간 사람들을 잡아와서 운동장에 세워놓고 채찍으로 두들겨 팼어... 도망갔다고..."

인터뷰 엄옥순(사할린 한인 2세) : "어머니 나이가 많아요. 시간이 없어서 한국에 못 가고 자주 못 봐요. 좀 가슴 아파요..."

인터뷰 윤상철(사할린 한인2세) : "한국으로 살러 안 가도, 여기 남아도 어느 나라 국민이냐 하면 여권을 보여주면서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오프닝

이곳은 러시아 사할린 섬 남쪽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끌려와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조선인 수 만 명이 해방과 함께 바로 이곳에서 조국으로 돌아갈 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배는 오지 않았고, 그들은 반세기 가까이 이곳에 버려졌습니다.

올해로 광복 71년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사할린 한인들의 고통과 기다림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사할린 한인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를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본 홋카이도 북쪽에 있는 러시아 사할린 주.

유즈노사할린스크는 사할린 남부에 위치한 주돕니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3시간 남짓 걸립니다.

이른 아침, 재래시장을 찾아갔습니다.

장사 준비에 바쁜 상인들.

동양인으로 보이는 상인들이 많습니다.

인터뷰 지달시(한인2세) : "(한인이시죠? 한국말 하실 수 있으세요?) 조금 (매일 일찍 나오세요?) 7시 (장사는 좀 되는 편이세요?) 예,좀 되죠"

주변 러시아 상인들은 한국 상인들을 최고로 칩니다.

인터뷰 따지아나(러시아 상인) : "한국 아주머니들 부지런하고 아침에 러시아 사람들보다 더 일찍 나오고요, 그리고 제일 늦게 갑니다"

이곳 상인인 강수자 씨도 해방 직전 러시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인터뷰 강수자(한인2세) : "(한인들이 왜 이렇게 부지런해요?) 부지런해야 살지요. 자식들한테 뭣하러 손 벌리겠어요"

강씨는 부지런함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을 거 같다고 했습니다.

인터뷰 강수자(한인2세) : "어머니 정말 부지런했죠. 농사짓고 아이들 도와주며...(아버지는) 일본 사람들이 (일본으로) 데려갔는데요 간 다음에 다시 안 돌아왔어요. 그래서 갈라져 있다가 어머니는 여기서 시집가고 아버지는 거기서 장가가셔가지고..."

강씨는 일제강점기 이곳으로 강제징용된 한인의 후손입니다.

사할린에는 강씨와 같은 한인 후손이 2만 5천명 가량 살고 있습니다.

전체 사할린 인구 50만명 중 5%가 한인 후손들입니다.

야채를 팔아 아들 둘을 가르쳤다는 김춘자씨.

인터뷰 김춘자(한인 2세) : "(며느님은 한인이세요?) 조선 며느립니다. (둘 다요?) 네 (착해요?) 착합니다, 내가 말했지요, 소련 여자면 우리집에 발걸음도 하지 말랬어요. 조선음식 좋아한단 말이에요. 우리 아이들은.."

70살, 해방 직후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 2세 변호사 윤상철씨를 만났습니다.

윤씨가 기억하는 아버지도 강제 징용된 다른 조선인처럼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인터뷰 윤상철(한인 2세 변호사) : "1942년도에 저희 아버지가 17살 때 경상북도 와촌면 덕천에 사셨는데요. 거기서 실제로 모집을 왔습니다. 17살에. 그 때 모집 온 사람들 대부분 다 탄광으로 정해져서 왔지요. 노예생활을 했지요. 아무데도 못 가고요. 자의로 나온 사람들은 경찰에 잡히면 당하고요, 그 탄광으로 되돌려 보내졌지요"

윤 씨와 함께 강제징용 위령비를 찾았습니다.

위령비에는 사할린으로 끌려온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다시 일본 탄광으로 징용되는 이른바 '이중징용'을 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패전 직후에도 일본군은 그냥 퇴각하지 않았습니다.

윤씨가 안내한 사할린 남부, 미즈호 촌이라고 불렸던 포자르스코예.

조선인 20여명이 일본군의 분풀이 대상으로 무참히 학살된 곳입니다.

녹취 윤상철(한인 2세 변호사) : "'이놈들 스파이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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