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현서원지 崇賢書院址 대전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 대전광역시의 기념물 제27호 영귀루 묘정비 숭현서현 입교당 동재 서재 내삼문 갑천과 나룻배 원촌동 서원말

Описание к видео 숭현서원지 崇賢書院址 대전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 대전광역시의 기념물 제27호 영귀루 묘정비 숭현서현 입교당 동재 서재 내삼문 갑천과 나룻배 원촌동 서원말

숭현서원지(崇賢書院址) Sunghyeonseowonji

대전광역시 유성구 원촌동에 있는
조선후기 김정 정광필 송인수 이시직 송시영
김장생 송준길 송시열 등 팔현(八賢)을 제향(祭享) 한
숭현서원의 서원지(書院址)

16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592년에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숭현 崇賢'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1992년 7월 22일
대전광역시의 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되었다.
대전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원촌동(院村洞)은 보통 서원말이라고 불린다.
이곳에 숭현서원이 있었던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삼현서원, 팔현묘

숭현서원의 전신은 회덕의 충절지사인
김정(金淨), 정광필(鄭光弼), 송인수(宋麟壽) 등
세분의 명현을 모시는 사우(祠宇)였다.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 서원에서는 송남수(宋枏壽),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俊吉) 등 거유들이 학문을 강의하는 등
이 지역의 학문중심지역 역할을 했다.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역임한 분이다.
김정은 조선 전기 문신이며 학자로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문에도 능하였고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송인수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사헌부 대사헌과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성리학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16세기 후반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는 이 서원은
1592년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숭현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숭현서원은 본래 회덕현 외남면
용두리(현재 대전시 목동)에 있었으며
처음 이름은 삼현서원(三賢書院)이었다.
임란 때 병화를 입어 소실되었다.
광해군 1년(1609)에 지금의 장소로 옮겨
복원되었고 후에 김장생김장생(金長生)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 등을
추가로 배향(配享)하였다.
인조 19년(1641)에 이시직과 송시영을
추가로 모시게 되었는데
서원 안에 별도의 건물을 마련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1~1898)의
서원훼철령(書院毁撤令)으로 고종 8년(1871)에
폐쇄된 후 복원하지 못하고
현종 8년(1667)에 세운 비석만 남아 있다.
1994년 발굴 조사한 결과 위패를 모시는 사당과
교육 장소인 강당, 이시직(李時稷)과 송시영(宋時榮)의
위패(位牌)를 모시던 별사(別祠) 등의 건물 터를 확인하였다.
서원터에 유허비(遺墟碑)만 남아 있다.

서원지(書院址)는 묘정비(廟庭碑)가 서있는
현 유성구 원촌동의 뒷산 기슭으로 추정되며
1991년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서원 터는 뒷산 줄기에서 갑천(甲川)을 향해
완만하게 흘러내린 산등성이를 다듬어서 만들었으며
터의 상부에는 정교하게 다듬어 만든
기단(基壇)이 있고 하부에는 기대석이 남아있다.

숭현서원은 1998년 대전광역시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원촌동에 복원되었는데 사우와 강당, 동무(東廡), 서무(西廡),
전사청(典祀廳), 고직사(庫直舍), 외삼문, 별사, 문간채 등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소유자(소유단체) 향교재단(회덕향교)

영귀루 詠歸樓
선빈들이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시를 읊조리기도 하던 숭현서원 문루 門樓
바깥 담에 세 칸으로 세운 대문 외삼문 外三門
≒밭삼문

숭현서원묘정비 崇賢書院廟庭碑
숭현서원의 내력을 적은 비(碑)
1625년 상촌 신흠(象村 申欽)이 짓고
1667년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추기(追記)
비의 글은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이 쓰고
서석 김만기(瑞石 金萬基)가 전서(篆書)를 쓰다.

현재의 비는 숭현서원을 복원하면서
2001년에 모사(模寫)하여 놓은 것이다.

묘정비 설명
"숭현서원묘정비는
숭현서원의 내력을 적은 비이고,
1625년 상촌 신흠(像村 申欽)이 짓고
1667년 우암 송시열이 덧붙인 내용을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
현재의 비는 숭현서원을 복원하면서
2001년에 모사하여 놓은 것이다."

입교당 立敎堂
서원의 가정 핵심적인 건물로 선비들이 강학(講學)하던 강당
청좌와 송이창(淸坐窩 宋爾昌, 1561~1627)이 중심이 되어
1617년(광해군 9년)에 건립한 건물이다.

동재東齋 서재西齋
원생들의 기숙 공간이자 강학 공간의 역할을 한 곳
훗날 제를 지내기 위해 멀리서 온 제관(祭官)들이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내삼문 內三門
≒팔덕묘
바깥채 안쪽에 세 칸으로 세운 대문
솟을삼문이 아닌 문 세 개가 떨어져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안삼문

사당 祀堂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셔 놓은 집
8현을 배향(配享)하고 제향(祭享)을 지내는 곳

갑천과 나룻배
당시 원생들이 회덕에서 서원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 갑천을 나룻배를 타고 건너 다녔다.
휘돌아 감도는 갑천(甲川), 닭발을 닮은 계족산(鷄足山)이
산수 명미(山水明媚)하기에 원생들의 심신을
고양(高揚)시켰을 것이다.`

원촌마을유래비
이곳에는 숭현서원(崇賢書院)이 있었으므로
서원말, 원촌, 원촌동이라고 부른다.
'서원말'은 '서원이 있는 마을'로 해석된다.
대전 유성구 원촌동 267-14

대전 유성구 엑스포로251번길 36
36 Yuseong-gu Expo-ro 251beon-gil, Daejeon
202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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