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전후 일상-대한민국 최초의 총선거, 광복 직후 올림픽 출전 등ㅣ다큐인사이트 현대사 아카이브-우리의 이름, 우리의 이야기 | 20240822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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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현대사 아카이브 [우리의 이름, 우리의 이야기]에서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전후에 촬영된 일상의 영상들을 소개한다. 고단한 시절을 살아낸, 평범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모습.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던 그들의 이름을 찾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린튼 가족, 대를 이어 우리의 땅에서 우리의 시간을 함께 하다

1912년, 미국 조지아 공과대학을 졸업한 20대의 젊은 선교사 윌리엄 린튼이 조선 땅을 밟았다. 주로 호남 지역에서 활동했던 그는 전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인 신흥학교 교장으로 교육 사업에도 헌신했으며, 3.1운동 당시에는 한국의 처참한 실상을 알리며 국제사회에 지지를 호소했다.

“할아버지가 3.1 운동을 보고 중요하게 말씀하신 것은
간디보다 먼저 이루어진 비폭력 저항이다”

윌리엄 린튼은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학교를 자진 폐교하면서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강제추방 당한다. 하지만 광복 이듬해 돌아와, 기전학교에 있던 신사에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

“내가없는 동안에 생긴 신사 터에다 공중 화장실을 지어라.
전주의 모든 분에게 신사가 생긴 것이 얼마나 개탄스러운 일인지 알리고자
행동과 명령 하나로 처리했습니다.”
-인요한 / 국회의원

가슴에 새겨진 채 잊힐 뻔했던 한 남자의 이름을 찾다

남양군도 일본군 비행장이 있던 티니안에도 한국인 노무자들이 있었다. 미군이 티니안을 점령한 후 포로가 된 한국인들은 그제서야 멈췄던 일상을 회복해 갔다. 그들만의 대표를 뽑았고, 작은 사회를 이루고 결혼식도 치렀다. 한국인 포로들이 치열하게 이어간 삶을 기록한 사진에서, 그리고 한국인 한명 한명의 이름이 쓰여있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당선 헌금 명부에서 우리는 차마 전하지 못해 잊혀질 뻔 했던 이야기들을 찾아냈다.

"그 처참한 전쟁 중 굶주림과 공포...
전쟁터에 장미꽃처럼 핀 결혼 사진 속에 아버님이 있는 거에요,
아버님이.”
-양상옥 / 티니안 한국인 포로 양승하의 아들

국제사회에 한국을 알린 재미 독립운동가 전경무

1947년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체육장은 전경무를 기리는 자리였다. 그는 4살 때 하와이로 이민해 대학까지 졸업했고, 재미 한인들을 이끌며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미국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자, 국제사회에 한국을 대변한 연설가였다.

“한국인은 스스로가 자치 능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인은 공통의 언어를 사용하며,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된 역사와 문명을 가진 민족입니다
...
유럽과 미국, 일본의 학교에서 교육받은 수천 명의 남녀가
시민 사회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전경무 연설 (1945 태평양문제협의회 IPR) / Voice of America

5.10 총선거, 온 국민의 관심과 기대를 받다

1948년 5월 10일. 최초로 우리 손으로 우리의 대표를 뽑는 총선거. 투표 당일이 아닌 선거 준비 과정을 촬영한,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영상을 소개한다.

“2분짜리 유니버설 뉴스 영상이 있는데
그 뉴스 영상을 만들려고 뉴스 릴들을 모아서 편집한
10분짜리 무성으로 된 영상이에요.”

영상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후보들의 얼굴과 이름들, 치열한 선거전, 선거 감시를 위해 한국에 파견된 UN 임시위원단의 모습까지 확인할 수 있다. 독립국가 수립을 향한 온 국민의 열망과 기대로 들뜬 분위기까지 생생하게 전해진다.

언더우드 가족이 전하는 오래된 이야기

1951년, 6.25 전쟁의 대치 상태 속에서 정전협상이 시작됐다. 유엔군 측에는 3명의 통역장교가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한국 이름은 원일한이다. 선교사인 아버지 덕분에 한국에서 성장한 그는 한국어가 유창했고, 정전협상장에서 벌어진 흥미로운 상황들을 구체적으로 전달했다.

“처음 만났을 때 미국 쪽에는 마이크를 하나 갖다 놨어요. 북쪽에는 마이크가 없었어요.
그런데 다음번에 오니까 자기네 마이크를 조금 더 큰 걸 갖다 놨어요.
다음번에 오니까 더 큰 거 갖다 놨어요. 다음에 2개를 갖다 놓고 .
마이크를 어떻게 할 것인지 협상하는 것도 며칠 걸렸다고.”

현재 기념관으로 보존되어 있는 언더우드 가족의 집에서 촬영된 영상에서, 귀한 남사당놀이 연행 장면을 찾았다. 남사당놀이는 약 40명에 이르는 남자들로 구성된 남사당패가 서민층을 대상으로 했던 놀이인데, 그 본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영상에는 무동들의 경쾌하고 힘찬 춤사위가 현장감 있게 담겨있다.

“사동은 저는 솔직히 공연하는 이 생활하는 내내 이 영상에서 처음 봅니다
...
선대 예인들의 기량이 매우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전수되지 않고 있습니다.
민중예술은 기록이 없으면 추측만 할 뿐인데요.
이렇게 영상이 있어서 보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문진수 /국가무형유산 남사당(대전지회장)

국제 스포츠 무대에 등장한 ‘KOREA’

대한민국 빙상 역사의 초창기 모습을 기억하시는지. 한국은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1948년 처음스위스 생모리츠 동계 올림픽에 출전했다. 아시아 유일한 참가국이었다. 이어 ‘피겨 스케이팅’도 한국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훗날 미국 아이스쇼단에서 활약했던 ‘조정근’ 선수의 앳된 모습도 볼 수 있다. 피겨 페어 1세대인 홍용명, 이해정 선수가 직접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둘이 전날, 말하자면 한강에 가서 리허설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한강에 나가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데
순찰 중인 경찰이 여보 여보 부르더니 그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그러면서
...
한국에서는 처음이니까. .
대중 앞에서 남녀가 손을 잡고 다리를 들고”
이해정 / 전 피겨스케이팅 선수

아직도 찾아내지 못한 수많은 이름이 남아 있는,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KBS 다큐인사이트 현대사 아카이브 [우리의 이름, 우리의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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