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선진포대첩#세계최초함포해전#일본침략
만약의 경우 대한민국이 일본과 전면전을 벌인다면 어느 나라가 이길까요?
이런 질문은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관심이 없지요?
그러나 최근 들어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관심사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사자성어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적으로 적을 공격하도록 한다는 말이죠.
적(敵)까지는 아니더라도 예로부터 이웃집의 불구경은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일단은 큰 구경거리였지요.
그러니 중국 사람들도 은근히 이웃집 불구경의 심사로 한일 관계를 주시하고
기대하며, 즐기는 분위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일 간의 역사적인 사례를 볼 때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가 930여 회의 외침을 겪었는데
그중에 80%에 가까운 720회 정도의 외침이 일본에 의한 것이었으며,
우리의 역사 기록에는 없지만,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쳐들어간 사례도 많다고 하니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분쟁 횟수는 1천여 회가 넘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무력에 의한 충돌 가능성은 낮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교역 관계로 인해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분쟁 가능성은
더욱 증가하고 있습니다.
무력에 의한 전쟁을 대신하고 있는 경제분야, 사회·문화 분야
등의 쟁점을 주제로 하는 주변국 국민 간 사이버전, 여론전 등은
현재도, 미래에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주변국과 전쟁이나 분쟁은 적당한 수준의 타협도 중요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을 확실하게 몰아붙여 이겨야 하는데
기존에 해오던 일상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상대를 이길 수 없으며, 확실하게 이기는 카드가 없다면
유리한 협상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무력에 의한 전쟁에서 흔히 기습달성과 주도권 장악을 전승의 결정적인 요소로 제시하는데,
여기서 기습이란 상대가 예상치 못한 시간, 장소, 방법으로
갑작스러운 공격을 가해 상대방에게 대응할 여유를 주지 않고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이때 기습이란 상대방이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알았다 하더라도 대비책을 강구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은 기습의 요소 즉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시간, 장소, 방법 중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적을 공격해 대승을 거둔 사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고려말 공민왕 시기
왜구의 침구에 대응했던 최무선의 진포대첩 사례입니다.
1333년부터 일본에서 남북조(南北朝)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열도에 두 명의 덴노(천황)이 존재했던 시기로
교또, 오사까 중심의 북조(北朝)와
요시노, 큐슈섬 중심의 남조(南朝)가 등장합니다.
두 세력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군량이 부족한 큐슈의 남조 세력 중 대마도와 연계한 세력이 왜구(倭寇)가 되어
한반도로 침구(侵寇) 즉 침입해 노략질을 계속하게 됩니다.
왜구는 일본을 지칭하는 왜(倭)에 떼강도라는 뜻의 구(寇)를 붙인 것입니다.
그러니 일본인 도적 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구의 침구는 1350년을 기점으로 고려 말기에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1350년에 10회를 시작으로 왜구의 침구는 계속 증가해 1377년 한 해에는 67회나 침구했습니다.
1350년이 경인년인데, 그래서 그때부터 고려 말까지 왜구를 ‘경인(庚寅)년 이후 왜구’라고 합니다.
왜구의 규모는 매번 수십 척부터 수백 척이나 되었는데,
해안에 상륙한 왜구는 곧바로 내륙으로 진격해
관가와 민간인을 습격하고 살해,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원래 고려는 우수한 수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여몽 연합군으로 일본정벌에서 많은 활약을 하기도 했지만
그 후 수군의 전투가 거의 없어 무력화되고 말았습니다.
왜구의 침구가 시작되자 고려는 황급하게 수군을 양성했지만, 왜구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고려군은 활을 주요 무기로 사용했지만,
왜구는 선박을 이용해 고려군의 활을 피한 후 고려군의 선박에 접근한 후 올라타
칼로 근접전투를 벌이는 보딩(Boding) 전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고려군은 매번 크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고려 조정은 바다에서 왜구를 상대할 수 없게 되자
왜구가 육지에 상륙한 후 육상전투로 왜구를 격멸한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고려가 해전을 포기하면서 수군을 거의 폐지하게 되었고
도서지역은 물론 해안 인근의 관청과 주민 모두가 내륙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럴수록 왜구는 한반도를 그들의 안방을 드나들듯 침략을 빈도를 더했고,
내륙까지 진출한 노략질로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이 없었습니다.
왜구의 침구가 계속되면서 백성의 삶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 조정은 징수한 세곡을 왜구에게 모두 약탈당해 관리들의 녹봉조차 지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시기 최무선(崔茂宣, 1326~1395)은 기존 방식을 답습하는 것으로는 결코 왜구를 이길 수 없으며,
창의적이고 새로운 전법과 무기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최무선이 생각한 것은 당시 개발 초기에 있던 화포를 해전에 도입해
왜구의 함정이 고려군의 함정에 접촉하기 전에
깨뜨리고, 불살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화약은 600년대 당나라에서 우연히 발명해
송나라(북송, 960~1279) 때부터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후 몽골 원나라 시기인 1332년에 제작한 화포가 최초로 화포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 조정은 왜구 격퇴를 위해 원나라의 화약과 화포 제조 기술을 계승한 명나라(1368~1644)에 화약 공급을 요청했지만
명나라는 극히 소량의 화약만을 제공했으며, 화약과 화포 기술을 국가기밀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왜구를 격멸하기 위한 최무선의 창의적인 방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화약 제조를 위한 자체 기술이 개발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또한, 왜구와 해전을 위해서는 지상에서 사용해온 화약과 화포를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최무선은 화약과 화포를 자체 개발하는데 몰두했습니다.
이때 더 중요한 것은 이제껏 화포는 반동으로 인해 지반이 튼튼한 지면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화포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새로운 개념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최무선의 화약 개발은 원나라 화약 기술자 이원을 만나면서 급진전하게 되었고
조정에 화통도감을 설치해 대장군포, 이장군포, 삼장군포, 육화포, 석포, 화포, 신포, 화통, 철령전등 각종 화포를 만들었다고
조선의 태조실록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1380년 8월, 왜구가 500척의 병선으로 금강하구 진포로 침구했습니다.
그들은 작은 배들을 서로 묶어 연결함으로써 많은 군량을 적재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고 내륙으로 진격했습니다.
고려 조정은 나세를 원수로 삼고, 심덕부와 최무선을 부원수로 삼아 100척의 함선으로
개경에서 진포로 진격해 왜구를 격파하도록 했습니다.
서해안의 해로를 이용해 남하한 고려 수군은 진포에 도착해 왜구의 함대를 함포를 이용해 기습 공격했습니다.
고려군의 함포 공격에 기습을 허용한 왜구는 대응책을 강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허둥대는 사이 고려군의 함포와 화전, 화통 등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왜선 모두가 불타고, 함대에 남아있던 왜구 대부분은 몰살했습니다.
1350년 왜구가 본격적으로 침공하기 시작한 이후 고려 수군 최초의 승리였으며,
세계 해전 사상 최초로 함포를 사용한 사례였습니다.
세계 해전에 함포를 도입한 것은 그로부터 200년 후인 1571년
유럽연합 기독교 국가와 오스만튀르크 이슬람국가의 대결인 레판토해전이었습니다.
이순신 해전의 승리 요결도 함포의 활용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세계 해전사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최무선의 진포대첩이 세계 해전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도 함포의 최초 사용 여부는 물론 진포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합니다.
진포의 위치를 두고 아직까지 군산시와 서천군 사이의 논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무선의 탄생지인 경상북도 영천시에는 최무선과학관이 조성되어 있고,
군산시는 성산면 성덕리 금강시민공원에 진포대첩 기념탑을 조성하고 금강하구 군산 해안 일대가 진포대첩 현장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면 서천군에서는 진포대첩 당시 해도원수 나세 장군의 생가가 서천군에 있고,
그 후손들이 서천군에 살고 있다며 나세 장군의 기념비를 세워 진포대첩의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역사학계에서는 왜구가 500척이나 침구했기 때문에
군산이나 장항 어느 한쪽 해안만 활용하기보다는 양쪽의 해안을 모두 활용했을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전적지를 최초에는 해남의 우수영에만 조성했는데,
차후 진도군이 가세해 군내면 녹진리에 진도타워를 조성해 기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사례입니다.
따라서 두 지방자치단체가 건설적이고 발전적으로 최무선 장군과 진포대첩 전적지를 개발하는 것은
장려할 일이며, 적극 성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한반도의 핵 문제를 4회에 걸쳐 말씀드렸는데
북핵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도 핵을 가져야 한다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무역 보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맞보복을 해야 한다는 논리는 가장 쉬운 대응 방법입니다.
우리는 차원을 달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가 이제껏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 사용하지 않았던 방식을 창의적으로 새롭게
개발해야 합니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개발한 무기나 방식은 멀지 않는 시기에 항상 새로운 대응 무기나 방식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의 전국시대 손자(孫子)도 전승불복(戰勝不復), 즉 한번 성공한 승리는 반복하지 않는다를
강조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의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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