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삶을 대상으로 볼 수 있다면 : '일체를 대상으로 아는 수행'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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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진리이고 담마입니다.
그 진리가 사람을 바꿉니다.
앙굴리말라가 수행해 아라한으로 바뀐 것은
이 변화의 진리를 따른 것입니다.
변화의 진리를 따르는 것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부처님의 수행법, 위빠사나, 통찰수행이
그 변화의 진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 길은 중도의 길인데요,
그 길을 걸음으로써 팔정도가 완성됩니다.
팔정도는 ‘정도’, 바른 길이면서
변화를 완성한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로서의 인간, ‘나’가 법으로서
바뀌고 승화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승화된 ‘나’는 내가 아니고 ‘제법무아’,
‘통찰적 연기의 중도 시스템’이 됩니다.
그것은 ‘tranquil wisdom medtation’의
길을 걷고 그 길을 향하게 됩니다.
이 때 연기는 조건을 풀어헤치는,
조건지어지지 않는 중도의 시스템입니다.
거기에 어떻게 ‘나’가 있겠습니까?
생각과 집착이 ‘나’를 형성한 것입니다.
‘나’를 마음으로 안다면,
그것은 지혜입니다.
없는 ‘나’를 진짜라고 세워둔 것입니다.
그 세워둔 것이 ‘아상’입니다.
아상이 강한 사람 옆에만 있어도 너무 힘듭니다.
그야말로 ‘꼰데’의 역할을 다 합니다.
‘있는 사띠’가 법을 채우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있는 사띠’는 ‘있는 법’이 됩니다.
사띠를 두는 이유는
사띠로 알고 지혜를 쓰기 위해서입니다.
수행해서 힘이 좋아지면 사띠와 지혜가
함께 일하는 걸 알게 됩니다.
사띠가 늘 있음으로써 지혜를 써줄 수 있습니다.
그 지혜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법 안에서 살면서 상 없는 자신을 영위합니다.
그것이 자유로움 아닌가요?
능숙함이 자유로움이고 중도입니다.
중도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불 법 승 삼보가 중도입니다.
삶을 담마의 그릇에 넣고 법에 대해 묻습니다.
자신의 삶을 대상으로 보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마음을 보고 관찰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마음이죠.
‘대박’도 ‘쪽박’도 자신의 마음의 원인 결과입니다.
상대와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입니다.
번뇌가 시키는대로 보는지 아닌지를 살펴야 합니다.
떼자니아 사야도는 “요니소 마나시까라 (바른 마음가짐)은 올바른 대상을 얻고,
아요니소 마나시까라(바르지 않은 마음가짐)는 잘못된 대상,
즉 낄레사(번뇌)를 일으켜서 손해를 본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루라도 어서 모든 일체가 다 대상으로 보이도록
지혜가 났으면 좋겠다”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일체를 대상으로 보는 지혜가
바로 일체지’입니다.
깨달으면 그 자체가 자비희사입니다.
지혜가 나면 그 자체가 자비희사입니다.
자비희사와 자신의 정신세계가
일치되는 것입니다.
떼자니아 사야도의 “다 대상으로 봐라,
다 자연의 이치로 봐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어나는 것을 대상으로 볼 때,
“다 대상으로 보라”는 말은
보는 쪽의 번뇌가 강할 때
번뇌를 줄이는 방편이 됩니다.
그렇듯 “다 대상으로 보라”는 가르침은
수행자의 정도에 따라 모두 적용됩니다.
사야도께서 ‘대상으로 아는 수행의 가치’라는
말도 많이 하셨습니다.
‘대상으로 아는 수행’이 바로 통찰수행이고,
알아차림이고, 사띠 수행입니다.
쉐우민 큰 사야도께서 말씀하신
“이 수행은 쉽지만 매우 깊다” 것과 상통하지 않나 싶습니다.
‘번뇌도 사띠나 지혜의 대상이 되면
번뇌가 힘을 잃는다’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나’도 ‘번뇌’도 대상으로 보면
나도 번뇌도 아니게 됩니다.
하지만 들어서만 되는 일은 아닙니다.
매 순간 알아차림을 놓치지 말고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힘 줘서 수행하라는 건 아닙니다.
놓치면 놓친 줄 알고, 있으면 있는 줄 알고
없으면 없는 줄도 알아야 합니다.
‘무도 거짓, 유도 거짓’ 같은 말이 안 나오록.
부처님의 수행은 너무도 명징하고 분명합니다.
담마(법)와 아담마(비법)이 분명히 갈립니다.
너무 분명히 갈려서
그 금이 안보입니다.
붓다 담마(불법)은
너무 분명해서 무경계입니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보이는 것도 안보이는 것도 아닌’
애매한 것을 ‘중구난방’이라고 합니다.
수행하면서도 알아차림에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건 ‘모하’(어리석음)입니다.
이 수행은 ‘깨어남’이기 때문에
당장 증명되는, 명징하고 분명한 것입니다.
구별이 너무 확실해서 금을 그을 수 없습니다.
경계를 지을 금을 그려넣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경계를 지으려 금을 긋는 순간 이분법적이 됩니다.
어둡고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과 같아집니다.
어둡다 깨어난 그 밝음 속에서
어디에 금을 긋습니까?
신념이 깨끗하고 청정한
그 마음에는 금이 없습니다.
‘심견청정, 보고에서 청정, 알고에서 청정’이
사띠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담마, 부처님의 수행법입니다.
대상으로 볼 줄 아는 지혜 속에 들어 있습니다.
재가자가 5계를 지키는 것만도
참 수승한 일입니다.
계를 받아’지닌다’는 말은 자발적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에 강요가 없는 것은 중도이기 때문입니다.
계를 받아지니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니다.
‘있는 사띠’, ‘있는 법으로’와 같은 뜻입니다.
있어야 불선의 행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합니다.
사띠를 ‘문단속’이라고 합니다.
사띠의 ‘성문지기의 비유’도 새겨볼 만합니다.
사띠는 단속하고,
지혜는 교화합니다.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명징하게 보지 못하는 것은
그 마음의 대상이 빤냣띠(관념)이기 때문입니다.
빤냣띠는 항상 가리고 감춥니다.
분명하고 명징하게 깨어있지 못하도록 합니다.
거기에서 ‘나’가 강화됩니다.
그래서 변화하는 진리를 못봅니다.
바꿀 수 없으니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상이 깊어지는 것은 그래서 입니다.
생노병사는 법으로 보면 변화과정입니다.
생노병사를 ‘자연의 이치’로 보면 지혜입니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병, 아픔, 고통 같은 것을
칠각지 수행을 하면서 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몸을 관찰할 때는
칠각지로 보면 좋습니다.
‘모든 게 다 마음이다’라고 한다면 간편해 집니다.
그것도 그렇게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대상으로 못보고 ‘단지 마음일 뿐’이라고 못보는 것은
모하가 너무 깊어서 입니다.
지혜가 나면 그보다 쉬운 게 없습니다.
손바닥 뒤짚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일체유심조’만으로도 많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내’가 아니라는 말은 들어있거든요.
하지만 다섯 글자만 외우지 이치는 모릅니다.
외운다고 체득이 되는 건 아닙니다.
사야도의 ‘마음에는 아는 성질이 있는’는 말은
대상으로 아는 수행의 가치를 뜻했던 것입니다.
생각으로 아는 것과 지혜로 아는 것은
천지차이로 다릅니다.
법이 보호해 줄 수 있는 지혜를
자신의 마음 안에 앉히는 수행이
‘대상으로 아는 수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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