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군] 해제중앙교회, 100년 교회 순례(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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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봉대로 37-6]

해제중앙교회는 1932년 3월 1일에 ‘양간다리 기도처’로 시작되었습니다. 광주 양림교회 출신의 정나열 전도부인에게 전도를 받은 교인들이 배윤화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1937년 5월에 교회 이름을 ‘양매교회’로 불렀고, 1947년 1월에는 예배당을 현재의 위치로 옮긴 후 ‘신정교회’로, 1967년 3월에는 ‘해제중앙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해제중앙교회는 6.25 전쟁 중에 피란을 가지 않고 교회를 지키던 김대엽 전도사를 비롯하여 임인재 장로, 황인경 집사, 김판업 집사, 홍순교 집사 등 5명이 인민군에 의해 순교를 당했고 2명의 자녀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순교자 임인재 장로는 황해도 출신으로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예수병원’에서 근무하다가 무의촌인 해제면 신정리에 ‘해동의원’을 개업하여 치료비가 부족한 환자들에게는 치료비 대신 예수를 믿을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1942년 10월에 해제중앙교회 초대 장로로 임직을 받았고, 노회로부터 해제중앙교회 교역자로 임명을 받아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에 교회 종을 빼앗아가려는 일본 경찰에게 저항하다가 옥고를 치렀습니다.

해방 후 교회 집사들과 촉성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지역 좌익세력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6.25 전쟁 중에는 부상당한 인민군을 치료해 달라는 요구를 받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치료해 줄 수 없다’고 거부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인민군은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의 맏아들 임성순을 심하게 고문하였습니다. 임성순은 그 후유증으로 피난민 수용소에서 살다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교자 홍순용 집사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가정에서 장남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났습니다. 그의 큰딸은 6.25 전쟁 중에 인민군을 피해 도망을 간 홍순용 집사를 내놓으라는 심한 고문과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신정리 앞바다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습니다.

해방 후 예배당을 신축할 때 윤의중 집사는 밭 세 마지기를, 박소녀 집사는 전 재산인 벼 열두 가마를 헌납하였습니다. 1957년에는 이선남 선생이 교회 오르간 구입을 위해 자신의 한 달치 급여를 헌금했습니다.

해제중앙교회는 다양한 교육활동을 통해 지역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1981년에는 시민을 위한 주부대학을, 1982년에는 문맹퇴치를 위한 성인학교 개설에 이어 무안군과 공동으로 새마을 유아원을 개원하였습니다. 2001년에는 해제어린이집을 인가받았으며, 2005년에는 노인들을 위한 해제중앙 은빛교실(노인대학)을 시작했습니다. 2007년에는 2005년에 시작한 해제중앙 청소년 양파공부방을 중앙양파지역아동센터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1983년에 해제중앙교회가 설립한 해제중앙신용협동조합은 1988년에 해제신용협동조합으로 재창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수익금 중 일부는 불우이웃돕기 등 지역발전을 위해 쓰이고 있습니다.

현재의 예배당은 1986년 7월에 봉헌한 예배당입니다.

[참고문헌]
1. 해제중앙교회 65년사, 1997년
2. 해제중앙교회 연혁

[음원출처]
1.크리스찬 BGM
(   / @christian-bg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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