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본기(1) / 갑골문자는 한민족의 작품 / 사마천 은본기 은나라 / 문명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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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은본기(殷本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인문학 TV 고경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사마천 사기 하본기 우임금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마천 사기 본기는 처음 오제 본기, 하본기 그리고 은본기의 순서로 나갑니다.
중국 최초 역사적 근거를 갖는 나라는 은나라 입니다. 하지만 그 은나라 거주민들은 동이족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한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시간부터는 은(상나라) 나라 (BC1600년~BC1046년 약 600년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은나라는 사마천 사기 역사책에 기록으로만 존재하던 오제 본기 그리고 하본기와 함께 전설 속의 나라로만 여겨져 왔었는데 은나라 시대의 역사적 증거(유물)가 발견되면서 전설이 아닌 실존했던 왕조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은나라는 중국 최초로 역사적 근거를 갖게 되는 실체가 확인된 나라가 되겠습니다. 원래 은나라는 ‘상나라’라고 불려져야 타당합니다만 상나라가 은허라는 지역을 상나라의 도읍으로 삼은 이후 은나라라고도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상나라, 은나라는 같은 왕조를 의미하게 된 거죠. 오늘 이 시간에는 은나라 유적 발견과 그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은본기 내용은 다음회에 은 왕조인 탕 임금부터 은을 멸망에 이르게 한 주왕까지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은나라의 역사적 근거가 된 유물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갑골문자 이야기를 들어 보셨죠? 바로 이 문자를 사용한 왕조가 은나라 때 사람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여 년 전인 1899년 청나라 말기 국자감 제주(祭酒) (지금 대학 총장의 지위에 해당)라는 신분을 갖는 왕의영(王懿荣)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고대 금석문을 연구하고 자료를 수집하던 고고학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의영이 말라리아(학질)에 걸려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치료를 위해 그 병에 특효가 있다고 잘 알려진 한약재, 용골(척추동물의 골격)을 구입하게 됩니다. 그때 한약재로 구하게 된 뼈를 곰곰이 살펴보던 왕의영이 용골(갑골)에 뭔가 희미하게 무늬가 그려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발견한 그 무늬가 바로, 세상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고대 문자인 갑골문자 (甲骨文字)이었던 것이지요. 이 뼈를 연구한 결과 이것은 용골龙骨도 아니고 수천 년 된 거북 껍데기와 야생동물의 뼈로서 거북 껍데기 뼈 위에 새겨진 도안의 형태를 한 문자를 식별하는데. ‘日’, ‘月’, ‘山’, ‘水’ 등의 글자, 나중에는 상나라대(商代)의 몇 명의 왕의 이름도 있는 것을 알아내고서 갑골문 위에 새겨진 것이 고대 글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용골의 발견 과정
그러면 어떻게 하여 이 갑골문이 새겨진 용골을 발견되게 되었고 용골이 약방에서 약재로 팔리게 되었는지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처음에 용골이 발견되게 된 계기는 허난 성 안양시安阳市 서북에 위치한 소둔촌 小屯村에 사는 이성이라는 한 농민이 밭을 가는데 이상하게 밭에서 오래된 것 같은 고대 거북이 뼈가(갑골) 계속해서 발견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성은 여러 번 밭을 경작하면서 동으로 만든 동기, 옛날 돈, 옛날 거울 등을 발굴하여 톡톡히 재미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성이 갑골(용골)을 중국에서 약재로 약방에 맨 처음에 팔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의 직업은 원래 이발사였다고 합니다. 이성이 약방에 갑골을 팔기 시작하게 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성이 처음 몸에 농창脓疮(피부 괴양에 따른 고름)이 있어 몹시 앓았는데 그가 가난해서 의원에 가서 약을 살 돈은 없고 그래서 밭에서 주은 갑골을 갈아서 농창 위에 발라보았습니다. 갑골은 밭에서 파낸 거북 껍데기인 귀갑龜甲과 소뼈인 우골牛骨이었는데 이를 환부 위에다 붙이자 흘러나오는 고름을 뼈가루가 빨아 당기고 상처가 아물고, 갈은 뼈를 칼로 다친 상처에도 바르면 아물었습니다. 이러한 효능을 이성이라는 사람이 알게 됩니다.
여러분 혹시 이명래 고약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제가 어렸을 때 몸에 난 상처 때문에 생긴 고름을 빼낼 때 이 고약을 붙이고 있으면 속까지 스며 있던 고름이 시원하게 빠져나오고 상처는 바로 아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고약의 주성분이 아마 뼈가루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성은 이에 착안하여 용골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약 이름을 용골이라 붙이고 이를 약방에 내다 팔 기 시작했습니다. 용골은 또 학질 즉 말라리아의 묘약으로도 베이징 약방에서 팔리기 시작합니다.
이런 사실이 소문이 나자 가난한 농민들이 야생동물의 뼈나 갑골을 팔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농한기를 이용하여 사방에서 뼈를 찾아내고 그것은 다시 대부분의 약점포에서 용골이나 거북판 약재로 팔기 시작한 것입니다. 큰 갑골은 약 상점에 가서 팔고 적은 갑골들은 말라붙은 우물을 메우는 데 사용하였다. 이 용골은 처음에 1근에 몇 전만 주면 살 정도로 가격이 저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왕의영이 이를 구입하여 갑골문이 글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 뤄전위羅振玉, 왕궈웨이王國維 등 수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이 이를 이어받아 고증 연구를 한 끝에 용골龍骨의 용도가 점을 치고 그 결과를 기록한 도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상商 왕조의 점술가가 왕가를 위하여 점을 친 점괘를 기록할 것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점을 쳐 갈라 터진 무늬의 장단과 거칠고 세밀한지, 굽었는지 곧은지 등을 통해 길흉과 성패를 판단하고 점을 친 내용과 결과를 칼을 사용해 새긴 것입니다.
그 내용을 해석한 것 중 예를 들면 은나라 왕이 전쟁을 언제 하면 좋은지, 왕비의 출산 일이 언제이고 아들인지 딸인지 등등 점을 보고 그것을 예측하고 결과를 뼈에 새겨 기록하고 하는 그러한 점술 의식에 사용되었던 것임을 알게 된 거죠.

은나라 왕은 정치와 종교를 함께 맡아서(제정일치) 다스렸는데요.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점을 쳐서 결정을 하고, 점을 친 결과는 거북의 배딱지나 짐승의 엉덩뼈에 적어 놓았다고 해요. 그것이 바로 갑골문자라고 합니다.

이처럼 약재로 쓰이던 용골이 학술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미국, 영국, 일본 등 국내외에서 많이 찾게 되면서 용골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해서 심할 경우 100배이상이나 비싸게 팔려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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