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봄은 씨를 뿌리는 계절이라고 합니다. 말마따나 곡식이나 작물 등의 씨앗을 뿌리는 시기이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봄을 맞아 우리가 뿌리는 씨앗이 반드시 곡식과 작물의 씨앗만은 아닐 겁니다. 아이들이 개학을 하고, 새로운 수업이 시작되고, 거리 곳곳마다 봄맞이 단장을 새롭게 하는 것도 실은 우리가 봄을 맞아 뿌리는 씨앗의 일종일 테니까요. 말하자면 새로운 삶을 위한 씨앗이라고나 할까요.
하물며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인, 1959년 봄에는 ‘책’으로 만든 씨앗이 뿌려지기도 했습니다. 제목부터 노골적(?)으로 봄기운을 물씬 풍기는 책인데요, 바로 『씨뿌린 사람들』이라는 책입니다.
『씨뿌린 사람들』. 제목부터 봄기운이 충만한데, 과연 그 안에는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까요? 궁금한 분들은 우선 표지를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이 책의 표지에는 ‘경북작고예술가평전’이라는 부제가 친절하게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당시 (대구가 속해 있던) 경북 지역 예술사에 있어 중요한 획을 그은 작고 작가들을 소개한 일종의 평전이기도 해요.
-. 씨뿌린 사람들 제목 의미
무엇보다 이 책에 소개된 작가들은 대부분 1920~1930년대에 주로 활동한 이들인데요. 당시가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예술 양식이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임을 감안한다면, 이 책에 소개된 작가들은 그러한 예술의 씨앗을 지역에 뿌린, 이른바 ‘농부’ 같은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씨뿌린 사람들』은 그렇게 당시 지역 근대 예술의 시작을 이들의 농부 같은 손길로부터 찾아보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그냥 농부라고 하기에는 일반적인 ‘소작농’보다는 ‘자작농’, 아니 우리나라의 예술 전반으로 보자면 오히려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한 ‘지주’에 가까운 사람들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 면면을 살펴본다면 아마도 제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이 적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책 속에 소개된 지주(?) 같은 농부들이 과연 누구인지를 한번 살펴볼까요?
-. 씨뿌린 사람들 목차
이 책에는 총 10인의 작가들이 등장하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첫 번째로 소개된 작가부터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듭니다.
1. 현진건
그 작가가 바로 「운수 좋은 날」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설가 현진건이기 때문이죠. 그를 소개한 ‘빙허 편’에서는 그의 오랜 문우이자, 이 책의 편저자이기도 한 백기만이 쓴 「빙허의 생애」, 그리고 현진건의 또 다른 대표작인 「B사감과 러브레터」를 만날 수 있습니다.
2. 이상화, 이장희, 이육사
이어 등장하는 작가들도 놀랍기는 마찬가진데요, 바로 이상화, 이장희, 이육사 시인입니다.
상화편
먼저 이설주 시인이 쓴 「상화의 전기」가 실려 있는 ‘상화 편’에서는 이상화 시인의 저 유명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나의 침실로」, 그리고 「금강송가」 등의 시편을 만날 수 있고요.
고월편
이어 이장희 시인을 소개한 ‘고월 편’에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문학자 양주동이 쓴 「낙월애상」을 비롯해 이장희의 대표작인 「봄은 고양이로다」와 「봄철의 바다」, 「눈은 나리네」 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육사편
또 이육사 시인의 ‘육사 편’에는 이은상의「육사소전」과 홍영의의「육사의 일대기」, 이렇게 두 편의 글과 함께 그의 대표작인 「광야」, 「청포도」, 「꽃」 등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오일도편
이들에 이어서는 경북 영양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시 전문지 '시원'을 발행한 시인 오일도의 생애와 작품을 소개한 ‘일도 편’도 만날 수 있고요.
3. 백신애
특히 당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 소설가이자, 이 책에 등장하는 작가 중에는 유일한 여성이기도 한 백신애에 대한 소개도 만날 수 있습니다.
‘백신애 편’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 '죽순'의 발행인인 이윤수가 쓴 「백신애 여사의 전기」와 백신애의 대표작인 「적빈」 등이 실려 있어 눈길을 끄네요.
-. 다양한 예술계 인물들 등장
그런데 이렇게만 보면 『씨뿌린 사람들』은 언뜻 문학 분야의 작가들을 조명한 책처럼 보이기도 해요. 하지만 당대에 뿌린 예술의 씨앗이 비단 문학에만 국한될 리 없겠죠. 이 책 속에는 문학 외에도 음악, 영화, 미술계에 씨앗을 뿌린 ‘지주 같은 농부’들이 잇달아 등장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켄터키 옛집’, ‘클레멘타인’, ‘스와니 강’ 등의 노래를 번안해 소개한 음악가 박태원을 비롯해 당대 우리나라 프롤레타리아 영화계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김유영, 그리고 대구의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으로 조선미전 특선을 수상하기도 했던 서양화가 김용조 등이 그들입니다.
예술계 인물 – 이인성
특히 이 책에는 이들과 함께 우리나라 근대미술계를 대표하는 서양화가이자, ‘조선의 고갱’, ‘천재화가’ 등으로 불린 이인성 또한 소개되고 있어 눈길을 끄는데요.
이원식이 소개한 「이인성의 생애와 작품」은 물론, 이인성이 직접 쓴 「화방수필 흰벽」도 만날 수 있어 더욱 관심을 모으네요.
-. 지주같은 농부 의미
이렇게 『씨뿌린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제가 왜 이 책에 소개된 작가들을 일컬어 ‘지주 같은 농부’라고 표현했는지 이해가 되시지 않을까 싶은데요.
-. 표지화
헌데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 책의 독특한 표지 그림은 당시 대구에 추상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기 시작했던 서양화가 정점식이, 표지에 쓰인 글씨는 서예가 안광석이 맡았는데요.
정점식, 안광석
이들 모두 당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중견 작가들이었지만, 지금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들 또한 각자의 분야에서 대단한 씨앗을 뿌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책의 현재적 위상
그래서일까요. 이 책은 그 자체로 중요한 컬렉션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마치 유명 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이나 수집가의 이름을 딴 컬렉션처럼 말이죠.
-. 저자 백기만
이 책의 편저자로 알려진 시인 백기만의 감각과 열정은,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또 다른 씨앗을 선사하고 있지 않나 싶은데요.
-. 씨뿌린 사람들 작품 의의
그것이 무슨 씨앗이었는지는 오늘날 거대한 대지로 형성된 우리의 문화예술계를 돌아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또한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봄에 뿌려진 이 책이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책으로, 또 씨앗으로 여기저기서 싹을 틔우고 있는 이유기도 하겠죠.
-. 출판사
여담이지만, 현재 참치로 유명한 이 책의 출판사, ‘사조사’의 전신은 ‘문성당’ 출판사인데요. 194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대구의 출판·인쇄업의 모태입니다.
-. 문성당의 위치
문성당 출판사 건물은 대구문학관과 인접한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당시 대구 출판업의 융성에 앞장섰던 ‘문성당’ 출판사는 어떤 곳일까요?
① 문성당
포정동에 위치한 이 건물은 문성당입니다. 문성당은 당시 해방 이후 모든 책이 일어에서 국어로 바뀔 것을 미리 예측하고 출판업에 뛰어든 지식인 주인용이 사장, 그의 장인이자 지역문인인 이설주가 공장장을 맡아 운영되었습니다.
출판업이 활황이던 1940년대에서 50년대, 문성당은 일반 서적부터 교과서, 잡지까지 한국전쟁기 특수를 누렸습니다.
② 사조사
이후 문성당은 서울에 자리를 옮겨 사조사로 이름을 변경합니다. 당시 사조사의 이름을 건 월간 잡지 사조가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사조사가 원양업으로까지 진출하며 누구나 한번쯤 먹어봤을 ‘사조참치’의 사조산업이 됩니다.
익숙한 가공식품의 회사가 지역 출판사의 후신이었다니 참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 문성당 – 사조사 – 사조산업
문성당 출판사가 현재 ‘참치’로 대표되는 유명 원양기업으로까지 성장했다는 사실 또한 이 책이 보여주는 또 다른 씨앗의 단면이 아닐까 싶은데요.
-. 이렇게 작은 책 한 권만으로도 하나의 씨앗이 된 『씨뿌린 사람들』. 책을 통해 우리가 봄을 맞아 뿌리는 다양한 씨앗들의 가능성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이 봄, 이 책을 만날 수 있는 대구문학관에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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