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1년 반에 걸친 내면소통의 마지막 강의

Описание к видео 장자, 1년 반에 걸친 내면소통의 마지막 강의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서 1년반 넘게 계속해왔던 내면소통 책 강의 시리즈가 이번 강의로 마무리됩니다.
내면소통 책의 마지막 강의를 장자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하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장자는 저의 첫 선생님이자 제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입니다.
만16세였던 고등학교 2학년 때 저는 장자를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장자를 통해서 철이 들었고, 장자처럼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후, 장자는 늘 저의 세계관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만물제동, 생사여일, 무위자연, 좌망 등은 저의 삶의 지표였습니다.
학자로서의 저의 삶의 여정 역시 장자로부터 시작해서 다시 장자로 돌아가는 듯 합니다.
이번 강의는 장자에 대한 강의라기보다는 제가 왜 장자를 그토록 줄기차게 좋아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출처: 내면소통 667 - 672)
“뜻을 하나로 모으고(若一志) 귀로 듣기보다는 마음으로 듣게나(无聽之以耳而聽之以心). 그리고 나아가서 마음으로 듣기보다는 기로 듣게나(无聽之以心而聽之以氣). 귀는 소리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고(耳止於聽), 마음은 그저 외부 사물에 대해 부합하는 데 그치지만(心止於符), 기라고 하는 것은 온갖 사물을 텅 비어 있음으로 대하는 것이네(氣也者 虛而待物者也). 도는 오로지 텅 빈 곳에 모이는데, 바로 이 텅 빈 것이 심재라네(唯道集虛 虛者心齋也).”

좌망에 관한 이야기는 《장자》 내편의 ‘대종사(大宗師)’에 있는 공자와 안회의 대화에 나온다. 안회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제가 나아진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인의를 잊었습니다(曰回忘仁義矣).” 하지만 공자는 “좋다. 그런데 아직 부족하다(可矣, 猶未也)”라고 답한다. 훗날 안회가 다시 공자를 만나 이야기한다. “제가 더 나아진 것이 있습니다. 이제 저는 예악도 잊었습니다(曰回忘禮樂矣).” 그러자 공자는 여전히 “좋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可矣, 猶未也)”라고 답한다. 시간이 더 지나서 훗날 안회가 다시 공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제가 더 나아진 것이 있습니다. 저는 좌망하게 되었습니다(曰回坐忘矣).” 그러자 공자가 문득 놀라며 되묻는다. “좌망이란 무엇이냐?”
안회가 답한다. “팔다리와 몸을 잊고(墮肢體), 듣는 것과 보는 것도 떨쳐버리며(黜聰明),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지식도 버리고(離形去知), 크게 통하는 것과 하나가 되는 것(同於大通), 이것을 좌망이라고 합니다(此謂坐忘).” 그러자 공자가 말한다. “도와 하나가 되면 좋다 싫다 하는 분별심이 사라지고(同則無好也), 도와 융화하게 되면 무상에 이르게 되니(化則無常也), 과연 현명하도다.
나도 너의 뒤를 따르련다(而果其賢乎! 丘也請從而後也).”

여기서 장자는 공자를 등장시켜 인의예악(仁義禮樂)이나 지식보다는 진정한 나를 깨달아가는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좌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불교의 사념처관의 구성요소와 매우 비슷하다. 우선 “팔다리와 몸을 잊는다”라는 것은 몸에 대한 수행을 통해 몸의 감각을 넘어선다는 뜻으로 이는 신관(身觀)에 해당한다. 그리고 ‘출총명(黜聰明)’에서 총(聰)은 귀로 잘 듣는 것을 의미하며 명(明)은 눈으로 잘 보는 것을 뜻한다. 즉 ‘보고 듣는 것을 내친다(黜)’라는 것이니 지각작용이 가져오는 느낌들을 잊는다는 것으로 수관(受觀)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지식도 버리는’ 것은 마음작용과 인식작용을 떠나는 것이니 심관(心觀)이라 할 만하다. 그리하여 ‘크게 통하는 것과 하나가 되는’ 것은 세상 만물의 이치를 꿰뚫어보는 법관(法觀)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장자》의 좌망의 개념에도 사념처의 요소가 순서대로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좌망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모든 집착과 분별심이 사라지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깨닫게 되니, 고타마와 장자가 추구했던 수행의 목표는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자》 내편의 ‘대종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진인(眞人)의 호흡은 매우 깊다(其息深深). 진인은 발뒤꿈치로 호흡하며(眞人之息以踵), 일반인은 목구멍으로 호흡한다(衆人之息以喉).” 이를 바탕으로 도교나 각종 기공에서도 종식법을 강조한다. 도교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호흡 훈련을 수행법의 핵심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장자는 결코 열심히 ‘발꿈치 호흡’을 해서 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진인은 발꿈치까지 호흡을 들이쉬고 내쉴 정도로 호흡이 깊고 고요하다는 것을 말했지만, 그것은 진인의 여러 가지 특성 중의 하나로 간단히 언급되었을 뿐이다. 일반인이 호흡을 발꿈치로 하기 위해 애써 노력한다고 해서 진인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무엇인가 되려 하거나, 무엇인가를 도모하거나, 혹은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는 ‘의도’에 대해 장자는 철저하게 부정적이다.

장자 철학의 핵심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이다. 도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으로 모든 것을 완성한다.
의도를 갖고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집착’을 낳고, 집착에 사로잡히면 편도체가 활성화된다. 모든 두려움은 집착에서 온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더 이상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以無所得故)” 상태가 되어야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게 된다. 무언가를 얻거나 획득하거나 성취하려는 조바심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않는 상태,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상태가 편도체 안정화를 위해서 필요하다. 그것이 곧 무위자연이다.
장자는 “고요하고 담담하게(恬惔寂寞)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아 무엇을 얻으려는 의도나 행위도 하지 않는 것(虛無無爲)”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깨달은 사람은 편안히 쉴 줄 아는 사람(聖人休)”이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편안한 사람이 성인이다. “편안히 쉴 수 있어야 평온함이 생기고(休焉則平易矣), 평온함이 생겨야 담담함이 생긴다(平易則恬惔矣). 그래야 걱정이나 불안감이 생기지 않는다(則憂患不能入).”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心無罣礙) 두려울 것이 하나 없는 무유공포(無有恐怖)”의 상태다. 마음근력 훈련의 관점에서 보자면 완벽한 편도체 안정화의 상태인 것이다.
《장자》의 ‘대종사’에 나오는 진인(眞人)은 한마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늘 고요하게 그대로 지켜가는 사람이다. 즉 자기조절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자기조절력이 뛰어난 사람은 감정의 변화, 특히 부정적 감정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인은 “높은 곳에 올라가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뜨거워하지 않는다.” 또 진인은 “잘못되어도 후회하지 않고, 잘되어도 자만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편도체가 지나치게 활성화되어 부정적 정서에 휩싸이는 일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진인이라고 해서 감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감정이 자연에 따라 자연스레 드러났다 사라질 뿐이다. “그 모습은 고요하며, 그 이마는 넓고도 편편하다. 서늘하기는 가을과 같으면서도 동시에 따뜻하기가 봄과 같다. 기뻐하고 성내는 것이 사계절과 통하며 세상 만물과 하나가 되어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예부터 진인은 그 모습이 당당하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부족한 듯하면서도 받을 것이 없고, 유유자적하며 홀로이면서도 고집스럽지 않고, 광대하게 텅 비어 있으나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
#내면소통 #명상 #내면소통명상 # 장자 #도교 #불교명상 #유교명상

Комментарии

Информация по комментариям в разработк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