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입추(立秋) [𝑷𝒍𝒂𝒚𝒍𝒊𝒔𝒕]

下
나는 사랑의 본질과 '나'라는 자아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다. 물론 이것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만큼 어리석고, 사랑과 인간의 심리에 대해 그 어떤 학문적 탐구의 시간을 갖지 않은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인간(人間)은 그 이름에 걸맞게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단지 믿음, 희망, 사랑에서뿐만 아니라) 그 관계 중에서 으뜸은 사랑이라. 사람의 본성은 생존을 위한 이기심이 그 근본에 있을 텐데 사랑은 그것을 뛰어넘어 바라는 것 없이 무한한 애정을 주며, 타인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게 한다. 사랑에 한번 빠지면 이 행동들은 너무나도 쉽고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그것이 의식이 아닌 몸 구석구석에 기록된다.

하루는 연이 내게 쪼르르 달려와 신이 나서 무언가를 재잘 재잘거렸다. 연은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롯이 '나 자신' 하나라고 말했다. 다만 수많은 상호작용과 복잡 다양한 계기를 통해 의식의 확장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나'의 경계가 확장되어 그 대상까지 '나'의 경계에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단지 그 대상까지를 나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문과출신의 우리는 과학적인 지식과 그 어떤 분석적인 사고 없이 사랑의 원인이나, 그 본질에 대해서 고찰하려 노력했지만, 그 어떤 대답도 찾지 못했었다. 연은 어떻게 발견했는지(혹은 어디서 들었는지) 신이 나서 내게 자신이 생각하는 정답을 말해 주었다. 연은 그간 본인이 아픈 것보다 내가 아픈 것이 왜 더 속상한지, 내가 그 어떤 보답도 해주지 않을 거라는 확신 아래서도 왜 날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왔는지 그 이유를 발견해 행복하다고 표현했다. 동시에 사랑을 함으로써 자신이라는 인식의 범위가 점점 넓어진다는 게 얼마나 로맨틱하고 발전적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감탄했다. 연의 말에 나는 너의 말이 맞다며 동의했다. 내가 태어나서 들은 사랑에 대한 설명 중에서 연이 가져온 대답만큼 합리적이고, 멋있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연만큼이나 기쁘게 웃지 않았다.

나는 그때의 생각에서 벗어나 가만히 오른손을 들어 내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손가락 마디마디와 손바닥이 접히는 그 간격 사이 주름들이 규칙 없이 이리저리 뻗어있다. 가늘지도, 길쭉하지도 않은 내 손에 주름들이 유난히 흉하게 보인다.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습하고 무거운 공기를 휘젓는다는 느낌이 들어 그리 좋지 않았다. 연을 제외한 그 무엇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손을 볼 때마다 다리미로 손을 펴고 다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동의했던 연의 '사랑 이론'은 다시 한번 곱씹어 생각해봐도 나름 이치에 맞고 멋있는 말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틀렸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연의 말대로라면 나는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하지만 저렇게 힘차고 열정적인 애를 나는 사랑하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으니 연의 말은 내게 거짓이다. 이 세상에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것은 '나', '나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연' 하나이다.

집앞에 종종 삼색 길고양이가 보이면 나는 편의점에 달려가 고양이용 먹이를 사와 쪼그려 앉아 저 멀리서부터 천천히 다가간다. 그리고는 그 삼색이가 나를 보고 움찔하면 그 순간 더는 다가가기를 멈추고 먹이 캔을 따서 땅에 내려놓은 채 조용히 뒤로 물러난다. 저 멀리서 삼색이가 먹이를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본다. 나의 유일한 취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 삼색이와 이름 모를 모든 길고양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옆집에 사는 은실 언니는 종종 친구와 카페에 다녀오며 빵을 유독 좋아하는 내가 떠올랐다며 빵을 싸오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성모 마리아 혹은 마더 테레사 그 비슷한 이미지가 떠오르며 세상에서 이렇게 착한 사람이 있을까 손뼉을 치며 감탄한다. 언니는 방긋 웃으며 직접 빵을 한 조각 떼서 내 입에 직접 넣어주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은실 언니를 세상에서 가장 세게 안아준다(맛에 따라서 종종 연보다 더 세게 안아줄 때도 있다). 하지만 역시 그렇다고 해서 은실 언니와 언니가 사다 준 빵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물론 빵은 연에게 한입도 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매우 맛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먹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나는 나를 이 벤치에 혼자 두고 어디론가 뛰어가 버린 연은 사랑한다. 삼색이만큼 귀엽지도, 은실 언니만큼 착하지도 않으며 빵만큼 맛있지도 않은(혹시 모르지, 연을 구워먹으면 눈물이 나도록 맛있을지도?) 연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한다. 내 손바닥을 보며 차오르는 혐오에 몸서리칠 정도로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나는 연을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가까이 그 경계의 틈에 연이 서 있으면서도 나라는 자아의 경계가 그 애를 삼키지 않음에 감사할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연을 사랑함에 있어서 '나'라는 자아를 내 마음과 철저히 분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조금의 과장을 붙여 말해보자면, 나는 나 자신을 싫어하고 혐오하기에 연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타인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자의식을 발견해 그 부분을 시작으로 그 사람의 전체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누군가는 상대에게서 나와 다른 점에 매력을 느끼고 사랑을 시작한다. 두 가지 경우 모두 공통적으로 '나'에서 사랑이 시작된다. 쉽사리 자기혐오에 빠지는 나는 연에게서 나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찾아냈고 나와 다른 연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와 다른 점에 매력을 느껴 사랑하기 시작하는 모든 이가 나처럼 자기혐오에 빠져있다는 말은 아니다.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는 이들도 있을 테니깐 말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단지 나는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는 의미다. 나는 잘 때 내 살과 살이 닿는 것이 싫어 최대한 넓게 몸을 펼치고 손가락마저 펼치고 잘 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지만, 연은 나와 닮지 않아 온몸의 살결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운 것으로 가득하다. 한 번도 나 자신을 좋아해 본 적 없는 나는 가엽고 불쌍하여서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내게 주어진 연이라는 아름다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내게 무엇보다 소중하고 애틋하다. 그렇기에 확신하기 어렵지만 나는 나를 혐오하기에 연을 사랑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사랑의 뿌리는 혐오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그 위에 피어난 줄기와 가지들은 항상 위태롭고 불안하다. 연의 사랑을 모두 받아 마셔도 아까운데 나는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나를 괴롭힌다. 연의 말대로 그 애는 푸릇푸릇한 생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항상 자신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에 가득해 지나온 것들과 현재를 확인하고 지나치려 한다. 그렇지만 나는 모든 것을 손 놓고 가만히 앉아 떠내려갈 뿐이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으며 몸 구석구석 곰팡이가 피어나고 구더기들이 살을 파먹고 있다. 이 공원 어디에선가 뛰어다니는 연은 살아 움직이며 삶을 확인하지만, 그가 떠나고부터 지금까지 나는 움직이지 않고 죽어있다. 나는 좌우로 고개를 돌려 길의 끝과 끝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디서 시작된 지 모를 길들이 양쪽으로 나 있다. 연은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불확실에 나는 주기적으로 양쪽을 바라봤다. 나 혼자만의 고민과 망상이 끝이 나면 나는 연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연은 항상 적당하고 정확한 타이밍에 내게 돌아온다. 아니나 다를까 연이 뛰어갔던 반대편 길의 가로등 아래 나타났다. 연은 뛰어오다 가로등 아래서 쪼그려 앉아 땀으로 범벅이 되어 숨을 헐떡거렸다. 연은 그 와중에서도 나를 보며 방긋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나는 그제야 발끝에 흔들거리는 슬리퍼를 제대로 신고 자리에서 벗어나 연에게 걸어갔다. 나는 힘껏 연의 팔을 붙잡고 연을 일으켰다. 연의 온몸은 땀으로 젖어있고 옅은 땀 냄새가 났다. 연은 아무리 땀이 나도 냄새가 잘 나지 않는 편인데 오늘 같은 날은 온도와 습도가 높아 땀 냄새가 조금 났지만 더럽다거나 지독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연의 말대로 그가 살아있다고 느껴졌다. 반대로 나에게는 아무 냄새가 나지 않을 것이다. 연과 나의 만남에서 두 번의 이별통보가 오갔다. 그날 나는 연에게 그중 첫 번째 이별 통보를 전했다.



00:00 220731 LERGRYN - leeyerin
(  / 220731-lergryn  )
03:36 Home - 결
(https://soundcloud.com/33221123/home?...)
07:29 그 안에서 - 정윤 그리고 현서
12:04 그림 - 버둥
15:46 그림자그림자 (feat. 사공, 구름달) - 정오월
20:36 여름의 마음 - 전진희, 강아솔, 박현서, 신온유
24:45 지나간 여름을 안타까워마 - 위수 (WI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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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네일 : Atonement (2007)